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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잡史]기생과 고객을 연결해주고 스케줄과 수입까지 관리한 ‘연회 전문가’

입력 | 2017-06-28 03:00:00


악공들의 음악과 검무기(劍舞妓)들의 칼춤이 어우러진 연회를 묘사한 혜원 신윤복의 ‘쌍검대무(雙劍對舞)’. 간송미술문화재단 소장. 동아일보DB

“서울의 기생 중에 누가 가장 유명하지? 소아라는 기생이네. 그 ‘조방(助房)’은 누구인가? 최박만이라네.”(박지원의 ‘광문자전·廣文者傳’에서)

18세기 중반 연암 박지원이 지은 ‘광문자전’에는 서울의 다양한 모습이 소개됐다. 당시 성행했던 사채업에 대한 내용도 있고, 검무로 유명했던 밀양 출신 기생 운심도 등장한다. 주인공인 광문 역시 거지생활을 하다가 의로움을 인정받아 약국에 점원으로 취직하기도 한다. 그리고 여기 전문 직업인으로서 ‘기생 매니저’라는 의미의 조방이 처음으로 등장한다. 조방은 기생의 스케줄과 수입을 관리하는 직업이다.

세종 대에는 고을 풍습을 어지럽힌 노흥준과 김전이란 ‘기부(妓夫·기생서방)’가 등장한다. 연산군이 기부의 명단을 검토하던 중 세걸이라는 기부가 적선아라는 기생을 사사로이 데리고 살았다는 이유로 참형에 처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면 조선 전기부터 기생과 손님을 연결해주는 역할을 했던 조방의 흔적이 보인다.

또 기부가 연회의 전문가임을 추정할 수 있는 기록 역시 조선 전기부터 보인다. 성종은 1475년 11월 16일 대비를 위해 큰 연회를 개최한다. 장악원을 중심으로 광대와 기생들을 모아 잔치를 벌이는데 여기에 우의정 윤사흔이 기부가 도제조(都提調·연회의 총책임자)를 알현하지 않았다고 꾸짖었다는 기록이 있다. 꾸짖은 뒤에 이 연회에서 기생의 역할이 적극적으로 바뀌고 다양한 모습으로 등장하는 걸 보면 윤사흔이 언급한 기부는 기생들을 관리하는 전문가임을 추정할 수 있다.

기생은 각종 국가 행사에 동원돼 춤과 노래로 흥을 돋우는 것이 본분이다. 이들은 나라에 소속돼 있었기 때문에 일반 남성을 접대하는 것은 원래 불법이다.

조선 후기 조수삼이 지은 ‘추재기이(秋齋紀異)’에 조방에 대한 일화 두 편이 실려 있다. 이중배라는 조방이 기생을 미끼로 한꺼번에 열 명의 손님을 속여 많은 돈을 벌었다고 소개한다. 그가 하룻밤에 벌어들인 돈은 1명당 1000전이라고 나온다. 1000전은 10냥에 해당하므로 이중배가 하룻밤에 벌어들인 돈은 100냥 정도가 된다는 말이다. 이는 당시 서울에서 괜찮은 집 두 채 정도를 살 수 있는 돈이다.

준수한 외모에 말솜씨도 뛰어난 조방 최 씨가 기생을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관리했다는 내용도 나온다. 특히 철저한 비밀주의 영업 전략을 고수해 날마다 부유층 자제들을 모아 파티를 열었는데도 소문이 나는 법이 없었다고 한다. 사람들은 손님의 비밀을 엄수하는 그를 ‘아방한(啞9閒)’, 즉 ‘벙어리 조방꾼’이라 불렀다.

조방에 대한 인식은 다소 부정적이었다. 조방은 기생을 착취하는 포주나 기둥서방 같은 존재로 여겨졌다. 근대로 들어서면서 국가가 기생을 관리하는 관기 제도는 폐지됐고 1917년 최초의 기생 조합인 다동조합(茶洞組合)이 창설됐다. 조방도 이름은 없어졌지만, 그 역할은 더욱 세분되고 조직화돼 이어졌다. 그에 따라 ‘말하는 꽃(解語花·기생)’은 철저하게 기업적으로 발굴, 양성, 관리됐다. 이는 기생 중심의 엔터테인먼트 사업이 개인의 영역에서 기업의 영역으로 확대되었음을 보여준다. 일제강점기 가수와 배우 상당수도 기생조합 출신이었다.
 
강문종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