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 표심 향배 따라 문재인 후보 운명 갈릴 듯
19대 대선 공식 선거운동이 시작된 4월 17일 서울 관악구 한 거리에 각 후보의 사진과 슬로건이 적힌 홍보 현수막들이 걸려 있다.[동아 DB]
2012년 대통령선거 유권자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했던 연령대는 40대였다. 전체 유권자의 21.8%로 50대(19.2%), 60대 이상(20.8%)보다 많았다. 투표율은 50대가 82%로 가장 높았다. 그 뒤를 60대 이상(80.9%), 40대(75.6%)가 이었다. 대선에서 당락을 결정하는 ‘키 플레이어’가 되려면 유권자 수가 많고, 투표율이 높아야 한다. 5월9일 19대 대선에서는 40대보다는 60대 이상이 ‘키 플레이어’가 될 공산이 크다.
잠정 집계된 19대 대선 선거인명부에 따르면 60대 이상 유권자는 24.4%로 연령대별 비중이 가장 클 것으로 보인다. 40대는 20.6%, 50대는 19.9%에 그칠 전망이다. 여기에 18대 대선 투표율이 이번 대선에도 그대로 유지된다고 가정하면 60대 이상의 표심이 실제 득표에 반영될 비율은 더욱 높아진다. 유권자수(24.4%)가 가장 많은 데다, 투표율(80.9%)까지 높기 때문이다. 선거는 투표에 참여한 이들을 모집단으로 한다는 점에서 유권자 수가 많고 투표율이 높을수록 실제 득표에 반영되는 비율이 높아진다.
선거운동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이후 60대 이상 유권자가 투표장에서 누구를 찍어주느냐에 따라 당락이 갈릴 수 있는 상황이다. 역대 대선에서 보수 성향을 보였던 TK와 충청 등에서는 4월20일 현재까지 안철수 후보 우세를 보이고 있다. 4월20일자 문화일보 대선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TK(대구·경북)에서 안철수(33.9%), 문재인(30.2%), 홍준표(15.1%) 순으로 나타났고, 대전·세종·충청권에서는 안 후보가 41.2%, 문 후보 30.1%, 홍 후보 9%를 기록했다. PK(부산·경남)에서는 문 후보가 33.5%로 안 후보(32%)를 근소한 차로 앞섰다.
● 안철수 대안론 만든 홍찍문
안 후보가 4월 들어 문재인 대세론을 위협할 만큼 지지율이 수직상승한 것은 각 당 대선경선 이후 대선 대진표가 확정된 이후다. 홍 후보는 3월31일 자유한국당 대선 후보로 확정됐지만, 경남지사 사퇴를 하지 않은 탓에 4월 9일까지 제한된 행보를 할 수밖에 없었다. 경남지사 재보궐선거를 치르지 않기 위한 ‘꼼수’라는 비판을 무릅쓰고 홍 후보는 ‘재보선은 없다’는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선거운동을 하지 못하는 불이익을 감수했다. 홍 후보의 발이 열흘 가까이 묶인 사이, 정치권에 회자됐던 유행어가 ‘홍찍문’이었다. ‘홍준표를 찍으면 문재인이 대통령된다’는 것.
홍찍문은 중도와 보수층에 폭넓게 퍼져 있던 문재인 비토층을 파고들면서 안철수 대안론으로 이어졌다. 안 후보 지지율이 수직 상승한 때도 그 즈음이다. 4월18일 19대 대선 선거운동이 본격 시작된 이후 만난 70대 초반의 충청 출신 기업가 L씨는 이렇게 말했다. 스스로 ‘보수주의자’를 자처하는 그는 일찌감치 반기문 전 유엔사무총장을 차기 대통령으로 마음에 뒀다고 했다. 그러나 반 전 총장이 귀국 이후 대선 불출마를 선언하면서 L씨도 함께 마음을 접었다.
보수층을 파고들었던 ‘홍찍문’ 흐름은 4월 중순 이후 ‘안찍박’에 의해 서서히 허물어지는 흐름을 보였다. ‘안철수를 찍으면 박지원이 상왕된다’는 것.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 등 보수층 기반 정당이 주장하는 ‘안찍박’ 주장은 보수층의 마음을 흔들었다. 대구에서 교사로 정년퇴임하고 지금은 한 문화센터에서 강사로 일하는 70대 초반의 K씨는 “안철수가 좋은 점도 있고, 안 좋은 점도 있는데, ‘안철수 뒤에 박지원 있다’고 하니 왠지 께름칙하다. 대북송금 문제도 그렇고”라며 ‘안찍박’ 주장에 마음이 흔들리고 있다고 했다.
“박지원이 뒤로 물러나고 정치에서 손뗀다고 하면 모를까, 지금 마음 같아서는 안철수를 지지하기가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는 대선 선거운동이 시작된 이후 주변 여론이 조금씩 변하고 있다고 귀띔했다.
“경선 끝나고, 그래도 홍준표를 밀어야 하지 않겠냐고 얘기하는 친구들이 많아졌다. 남 좋은 일 시킬 바에야, 이번에는 어려울지 몰라도 다음에 (TK가) 집권 하려면 보수를 살려놔야 하지 않겠느냐고….”
4월 18일 자유한국당 홍준표 대선후보가 부산 서면 거리유세장에서 빨간색 종이비행기를 날리고 있다.[동아 DB]
● 安·洪은 제로섬 관계
홍찍문 주장에 안 후보 지지율이 상승했다가 안찍박 여파로 안 후보 지지율이 다소 주춤해지자 안 후보 진영에서는 ‘사드 배치 찬성’ 등 안보를 유독 강조하고 나섰다. 이는 다분히 흔들리는 보수 지지층을 붙잡기 위한 행보로 해석된다. 홍 후보는 안 후보에게 쏠려 있는 보수 지지층을 자신에게로 돌려 세우기 위해 ‘홍준표를 찍으면 홍준표가 대통령 된다’며 ‘홍찍홍’을 강조하고 있다.
홍찍홍 주장이 보수 지지층을 얼마만큼 파고드느냐에 따라 문재인-안철수 양강 구도에 변화가 올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안 후보의 주된 지지층이 대구경북, 충청 등 보수 유권자층이 두터운 지역에서의 높은 지지를 바탕으로 문 후보와 양강구도를 형성해 왔기 때문이다.
만약 홍찍홍 주장이 보수 지지층을 파고들어 안 후보에게 쏠려 있던 보수 지지층 일부가 홍 후보 지지로 돌아서게 되면 양강 구도가 1강 2중 구도로 바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문재인 필승 구도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김상진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겸임교수는 “홍 후보 지지율이 10%를 돌파하면 상승세를 타고 15%를 넘어설 수도 있다”며 “그렇게 되면 문-안 양강 구도는 1강 2중 구도로 바뀔 수 있다”고 말했다.
안 후보와 홍 후보의 지지율은 어느 한쪽이 오르면 다른 한쪽이 내려가는 ‘제로섬 관계’에 놓여 있기 때문이다. 또 다른 경우는 안 후보에게 쏠려 있던 보수 지지층이 홍찍홍을 현실화시키기 위해 총결집하는 경우다. 여론조사로 표출된 보수층은 물론 ‘샤이 보수’까지 총결집하면 문-안에서 문-홍 양강 구도로 바뀔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선까지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 급격한 보수 총결집이 나타날 수 있을 지는 미지수다.
PK 출신 50대 초반의 회사원 C씨는 4월초 서울에서 고향 친구들과 가졌던 동창모임에서 있었던 얘기를 들려줬다.
“처음에 대선 얘기할 때는 안철수가 좋다는 친구가 반 정도 있었고, 홍준표, 문재인이 낫다는 친구가 나머지 절반쯤 됐다. 그런데 한 친구가 ‘안철수는 좋은데 박지원 때문에 못찍겠다’고 하자, 분위기가 묘하게 바뀌더라. 술자리를 파할 때쯤에는 안철수, 홍준표, 문재인 세 패로 나뉘더라. 누가 될 지는 투표함 뚜껑을 열어봐야 알 것 같다.”
침묵하는 다수가 투표장에 나가 누구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이번 대선 당락은 크게 엇갈릴 공산이 크다. 표심도 겉으로 드러난 여론조사 결과가 전부일 수 없다. 지난해 브렉시트(Brexit)와 미국 대선은 ‘샤이 보수층’이 실제 투표를 통해 여론조사와 다른 결과를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음을 보여준 선거였다. 5·9 대선에 이명박, 박근혜 두 정권을 만드는 데 앞장섰던 40% 가까운 보수 유권자의 표심이 누구를 향할지 주목된다.
구자홍 기자 jhkoo@donga.com
<이 기사는 주간동아 1085호에 실린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