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수 산업부 기자
2013년 봄, 국내 한 여성 구두 업체 직원은 잘라 말했다. 6개월 전 열린 파리 컬렉션에서는 3∼5cm 구두가 대세가 됐다. 우리는 어떨지 물었더니 ‘그럴 리 없다’는 답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당시 한국 여성들에게는 ‘킬 힐’이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다.
예상은 빗나갔다. 킬 힐의 콧대는 순식간에 꺾였고, 낮은 굽 구두가 왕좌를 차지했다. 4년이 지난 지금도 낮은 굽 구두와 스니커즈가 인기다. 유행의 흐름은 참 신기하다.
트렌드 세터가 유행을 제시하고 기업이 마케팅을 통해 이를 대중화하는 공식은 현대에도 유효하다. 샤넬, 루이뷔통 등 이른바 ‘명품’ 브랜드의 부상에는 전통 있는 유럽 패션에 대한 선망이 깔려 있다. 미국과 아시아 소비자 덕분에 명품 시장은 20여 년 동안 2008, 2009년 금융위기를 제외하고는 매년 고성장을 기록했다.
성장에 제동이 걸린 것은 2014년 무렵이다. 글로벌 경영 컨설팅업체 베인앤드컴퍼니에 따르면 글로벌 명품 시장 성장률은 2014∼2016년 각각 3%, 1%, 0%로 나타났다. 확연한 저성장이다. 반면 여행, 외식 등 럭셔리 경험 산업의 지난해 성장률은 명품보다 5%포인트 높았다. 베인앤드컴퍼니는 “럭셔리 소비는 물건에서 경험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분석했다. 한국도 글로벌 시장과 양상이 비슷하다. 옷은 그렇게 안 사도 여행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 5월 황금연휴에 100만 명이 해외여행을 떠날 것이란 전망이 나온다. 이제 여행이 유행이 됐다.
한 명품 시장 전문가는 이를 두고 “실리콘밸리가 트렌드 세터가 됐기 때문”이라고 분석했다. 현재 글로벌 시가총액 3대 기업은 애플, 알파벳(구글 지주회사), 마이크로소프트다. 부(富)가 정보기술(IT) 업계에서 나온다. IT 부자들이 선망의 대상이 됐고, 이들의 라이프스타일이 패션 유행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다.
2000년대 미국 월가가 잘나갈 때에는 이들이 입는 명품 슈트가 인기였다. 이제는 후드 티를 입고 슬리퍼를 신은 실리콘밸리 스타일이 대중의 눈에 더 멋져 보인다. 이들은 후줄근해 보여도 철학과 취향에 맞는 소비를 한다. 자유롭게 여행을 다니고 온라인으로 자신의 라이프스타일을 대중에게 직접 알린다.
김현수 산업부 기자 kimhs@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