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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스크 진단]무모한 도발

입력 | 2017-03-06 03:00:00


김창덕 산업부 차장 

미국계 행동주의 헤지펀드 A사가 자사와 뜻을 같이하는 해외투자자 지분을 합쳐 기아자동차 지분 17.03%를 갖고 있다고 공시했다. A사와 해외투자자 각각의 기아차 보유 지분은 5% 미만이어서 협력을 선언하기 전까진 공시 의무가 없었다. A사와 연합군은 기아차 주주총회에서 자신들이 원하는 감사위원을 선임하기 위해 지분을 규합한 것이다.

기아차 최대주주는 현대자동차로 지분은 33.88%다. 특수관계인인 정의선 현대차 부회장의 1.74%까지 포함하면 35.62%다. 예전 같으면 A사 연합군의 공세는 별로 걱정할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상황이 달라졌다. 상법이 개정되면서 기업들은 감사위원을 다른 등기이사들과 분리 선출해야 한다. 감사위원 선출 때 대주주 의결권은 3%로 제한된다. A사와 연합군 의결권(17.03%)이 대주주 의결권(3%)보다 훨씬 많으니 표 대결에서 유리하다.

A사 측이 내세운 B 씨는 기아차 감사위원에 선임됐다. 상법 개정안으로 집중투표제까지 도입되면서 A사와 연합군이 B 씨에게 ‘몰표’를 던진 결과다. 집중투표제는 기존 주식 수에 신규 선임 이사 수만큼 곱한 의결권을 준 뒤 한 후보에게 표를 몰아줄 수 있도록 한 제도다.

감사위원이 된 B 씨는 기아차의 모든 경영활동을 낱낱이 들여다볼 수 있다. B 씨가 넘겨준 정보를 근거로 A사와 연합군은 기아차 광주공장의 해외 이전을 요구했다. 해외 공장에 비해 높은 임금구조와 낮은 생산성이 이유였다. 기아차는 결국 국내 생산물량을 대거 유럽과 북미 지역으로 옮긴다고 발표했다. 곧이어 구조조정 뉴스가 신문에 대서특필됐다.

깜짝 놀랐다면 뒤늦게나마 사과의 말씀을 전한다.

이건 가짜 뉴스다.

야권이 추진하던 상법 개정안은 지난달 일단 통과되지 못했다. 지분 공시를 한 A사는 없다. B 씨의 감사위원 선임, 광주공장 생산물량의 해외 이전도 사실이 아니다.

하지만 여야 대선주자들이 재벌 개혁을 내걸고 있는 가운데 상법 개정안이 언젠가 지금 형태대로 통과된다면, 이 모든 ‘가짜’가 ‘진짜’가 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기업들의 엄살이나 엄포라고 치부하기에는 설득력이 적지 않은 시나리오다.

신석훈 한국경제연구원 기업연구실장은 국내 기업들이 해외 헤지펀드들의 ‘울프팩(늑대 떼) 전술’에 희생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여러 헤지펀드가 5% 이하 지분을 보유하며 공시의무를 회피하고 있다가 별안간 공동 전선을 구축해 기업을 공격하는 전술이다. 그는 “처음에는 늑대가 한 마리인 줄 알았다가 어둠 속에서 번쩍이는 수십 또는 수백 마리의 눈과 마주치는 순간 모든 것을 자포자기하게 된다. 상법 개정안이 국내 기업들을 이런 상황에 처하게 하는 것은 아닌지 염려된다”고 했다.

한경연은 지난달 집중투표제와 감사위원 분리 선출이 도입되면 국내 10대 기업 중 절반 정도가 해외 헤지펀드 측 인사의 이사회 진입을 막을 수 없을 것으로 분석했다.

해외 거대 펀드들은 자본시장에서의 전투 경험이 국내 기업들보다 월등히 많다. 해외에서는 자본 대 기업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주주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포이즌 필’ ‘차등의결권’ 같은 대주주의 경영권 방어 장치도 함께 도입했다. 국내에는 없는 제도들이다.

눈앞에 밀어닥친 적을 보고서야 부실한 성곽을 보수한다면 이미 때는 늦었다. 하물며 그 성곽마저 없애 공격을 망설이던 적에게 ‘초청장’을 보낸다는 건 상상하기도 싫은 악몽이다.

김창덕 산업부 차장 drake0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