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경주 사천왕사터 발굴
20일 경북 경주시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에서 최장미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윤형원 국립부여박물관장, 윤근일 전 경기문화재연구원장(왼쪽부터)이 사천왕사 녹유신장벽전을 배경으로 발굴 당시를 회고하고 있다. 경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
2006∼2012년 7년에 걸쳐 발굴이 이뤄진 사천왕사에는 금당과 목탑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주춧돌과 귀부(龜趺·거북 모양의 비석 받침돌), 당간지주(幢竿支柱)만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다. 하지만 지금으로부터 1300여 년 전 이곳에서 동아시아 최강국 당나라와의 전쟁을 목전에 둔 문무왕이 온 백성의 염원을 담아 부처의 도움을 갈구했다.
○ 신라의 미켈란젤로가 남긴 걸작
사천왕사터에서 출토된 녹유신장벽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사천왕사에서 출토된 녹유신장벽전(綠釉神將벽塼·녹색 유약을 칠한 신장 조각 벽돌)은 승려 양지가 남긴 수작으로 손꼽힌다. 영묘사 장육삼존상과 천왕상을 제작하기도 한 양지는 ‘신라의 미켈란젤로’로 통한다. 녹유신장벽전은 조각가 이름과 제작 시기(679년)가 모두 확인되는 신라 불교조각이라는 점에서 학술적 가치가 높다.
2009년 5월 국립경주박물관 사천왕사 특별전에서 공개한 녹유신장벽전 복원품은 커다란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일제강점기에 수습된 벽전 조각과 발굴 현장에서 출토된 조각이 90여 년 만에 결합돼 온전한 모습을 드러낸 일대 사건이었다.
이는 2006년부터 발굴을 맡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의 윤근일 당시 소장(70·전 경기문화재연구원장)과 윤형원 학예연구실장(51·현 국립부여박물관장), 최장미 학예연구사(38·현 국립가야문화재연구소 학예연구사), 차순철 전문위원(49·현 서라벌문화재연구원 조사연구단장)의 노력 덕에 가능했다.
○ 목탑 ‘면석 장식’ 역할 밝혀져
목탑 기단부 상상 복원도. 면석으로 쓰인 녹유신장벽전이 보인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2006년 10월 12일 사천왕사 서쪽 목탑 터 발굴 현장. 계단 돌이 쓰러져 생긴 틈 사이로 차순철이 조각상을 발견했다. 목탑의 기단 면석을 장식한 당초 무늬 벽전과 녹유신장벽전 조각이었다. 파괴된 계단 돌이 벽전 쪽으로 쓰러진 건 발굴팀엔 행운이었다. 흙더미 속에서 계단돌이 감싸준 덕에 녹유신장벽전이 토압에 휩쓸리지 않고 제 위치를 지킬 수 있었기 때문이다. 고고학에서 유구 조성 당시 유물의 본래 위치를 파악하는 건 매우 중요하다. 유물의 성격을 규정짓는 핵심 단서가 될 수 있어서다.
한 발굴조사원이 목탑터에서 녹유신장벽전을 노출시키고 있다.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 신장상…사천왕 vs 팔부중 논쟁
경주 낭산과 사천왕사지 발굴현장 전경.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사천왕사지 가람배치도.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
이에 따라 녹유신장벽전 3개가 한 세트임을 감안할 때 신장상의 정체는 사천왕이나 팔부중이 아닌 제3의 존재였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불교조각 연구자인 임영애 경주대 교수는 “탑의 가장 아래인 기단에는 신격(神格)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신왕상(神王像)이 조각됐을 걸로 본다”며 “그보다 위인 사천왕상은 목탑 안에 봉안됐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의 인디아나존스들
<26> 부여 왕흥사 목탑 터 발굴
<25> 공주 석장리 유적 발굴한 박희현 서울시립대 명예교수
<24> 익산 왕궁리 유적 발굴한 최맹식 국립문화재연구소장, 이주헌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장, 전용호 학예연구사
경주=김상운 기자 su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