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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정훈의 호모부커스]묵독과 낭독

입력 | 2017-02-06 03:00:00


표정훈 출판평론가

  ‘책 읽을 때 그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고 혀도 움직이지 않았다. 우리는 종종 이런 식으로 침묵 속에서 독서에 빠진 그를 발견하곤 했다. 그는 절대로 큰 소리를 내어 글을 읽지 않았다.’ 밀라노의 주교 암브로시우스(340∼397)가 책 읽는 모습을 아우구스티누스가 묘사했다. 10세기까지 서양에서 소리 내지 않고 읽는 묵독은 드문 일이었다. 독서는 기본적으로 소리 내어 읽는 것, 낭독이었다.

 동아시아도 마찬가지였다. 조선시대 정인지(1396∼1478)의 글 읽는 소리에 반한 옆집 처녀가 담을 넘어 방으로 뛰어들자, 정인지는 절차를 밟아 혼인하겠노라 달래어 처녀를 돌려보냈다. 이튿날 정인지는 이사를 가 버렸고 처녀는 상사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조광조, 심수경, 김안국 등도 글 읽는 소리로 처녀가 담을 넘게 했던 전설의 주인공들이다.(정민, ‘책 읽는 소리’)

 고대 인도의 성전(聖典) 리그베다, 사마베다, 야주르베다 등은 낭송하는 음까지 자세하게 정해져 있었다. 이슬람의 ‘꾸란’은 혼례나 장례, 국경일, 각종 공식 모임 등에서 낭송되며 독경사(讀經士)를 초빙할 때도 있다. 유대인들도 다양한 악센트와 리듬으로 각 지역 특유의 정서까지 반영해 성경을 낭독했으며, 역시 독경사들이 활동했다. 전통사회에서 성립된 텍스트 대다수는 낭독을 전제로 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낭독회는 1920년 2월 서울 종로 YMCA에서 열린 ‘폐허’ 동인들의 시 낭독회였다. 역사학자 이병도가 사회를 맡았고 목덜미를 덮도록 머리 기른 시인들이 자작시를 낭독했다. 시인 황석우는 취기에 온몸을 덜덜 떨면서 시를 낭독하여 청중의 폭소를 자아냈다. 문학 동인회 파스큘라가 1925년 2월 서울 경운동 천도교기념관에서 연 ‘문예 강연 및 시, 각본 낭독회’도 화제였다. 이상화, 김기진, 박영희, 김억, 연학년, 안석영, 박종화, 민태원 등이 강연하고 작품을 낭독했다.

 18세기 프랑스의 개인 살롱에서 책을 낭독하고 감상하는 풍경. 조선의 선비 집안 규방에서 부인들이 전문 낭독가인 전기수(傳奇수)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는 모습. 1850년대부터 작품의 주요 대목을 연기하듯 낭독했고 영국, 미국, 캐나다에서 순회 낭독회를 열어 큰 인기를 모은 찰스 디킨스. 독서의 역사에서 낭독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다. 눈과 머리로 읽는 묵독에 비해 낭독은 온몸으로 읽는다. 오늘날 크게 바뀐 독서 환경 속에서 낭독 문화를 되살릴 방안은 무엇일까.
 
표정훈 출판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