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사라진 전통 코팅제 ‘명유’, 현대과학으로 재탄생

입력 | 2017-02-03 03:00:00

KIST 한국전통문화기술연구단… 사료 바탕 촉매없이 복원 성공




남기달 KIST 책임연구원이 나무에 명유를 바르고 있다. 현대 기술을 적용해 재탄생한 명유는 들기름 외 다른 물질이 첨가되지 않아 전통방식으로 제작했을 때보다 색이 맑다.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제공

  ‘궁궐을 고쳐 칠하기를 명하였는데, 명유(明油) 4백 두(斗)를 썼다.’

 조선왕조실록 태조 13권의 기록이다. 태조의 궁궐 단청에 명유를 발랐다. 들기름에 밀타승(일산화납), 활석(무르고 부드러운 규산염 광물), 백반(명반석을 가공하여 얻은 결정형의 약재)을 넣고 뭉근한 불로 끓였다고 한다.

 명유는 목재 건축물이나 단청에 칠하는 코팅제로, 볶지 않은 생들깨를 짜낸 기름을 꾸덕꾸덕하게 만든 것이다. 수분 때문에 목재가 썩는 것을 막아준다. 명유 제조 장인들이 차츰 사라지면서 명유는 문헌 속에만 남았다. 600여 년이 흘러 과학자들의 손으로 명유가 재탄생했다.

 평균 나이 59.8세.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에서 평균 연령이 가장 높은 연구자들로 뭉친 한국전통문화기술연구단이 사료를 바탕으로 명유를 복원하는 데 성공했다.

 남기달 책임연구원은 “문헌에는 숙련된 주부의 요리법처럼 ‘백반 약간, 밀타승 많이, 활석은 조금 적게’ 같은 식으로 애매하게 표현돼 있다”며 “80번이 넘는 실험 끝에 현대적으로 명유를 재해석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연구진은 들기름과 함께 넣은 백반과 밀타승, 활석이 반응을 돕는 ‘촉매’ 역할을 하고, 명유를 끓이며 저어주는 과정이 산소를 공급하는 역할을 한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에 착안해 99.9%의 순수한 산소를 투입하며 섭씨 80∼120도의 고온에서 끓여 촉매 없이 명유를 제조하는 데 성공했다. 전통 문물을 복원하면서도 현대 과학의 힘을 더해 친환경적으로 ‘업그레이드’한 것이다. 촉매가 들어가지 않은 복원 명유는 역사 속 명유보다 색이 더 맑다고 연구팀은 설명했다.

 남 연구원이 제작한 명유를 목재에 바르고 물을 떨어뜨리자, 물이 스며들지 않고 방울을 만들며 흘러갔다. 색이 맑아 나무 본연의 무늬와 색을 즐길 수 있다는 장점도 있다.

 홍경태 책임연구원은 “요즘 사용하는 석유화학 코팅 제품은 휘발성유기화합물(VOC)을 뿜어 아토피 등을 유발하지만, 이번에 개발한 복원 명유는 들기름으로 만든 것이라 안전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어 “아직 양산 기술을 개발해야 하지만, 전통을 발전시켜 좋은 제품을 만든다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연구진은 전통 유기의 재해석에도 성공했다. 전통 유기에서는 음식물이 잘 상하지 않아 보관에 용이하다. 구리 성분 자체가 박테리아를 없애주는 성질이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구리와 주석을 녹이는 과정에서 기포가 많이 생긴다. 모양을 만드는 과정에서 쉽게 깨지고, 기포 구멍이 남아 사포질로 표면을 매끄럽게 해야 하는 문제가 있다. 

 전통 제조법에선 지푸라기를 넣어 용액 속 가스를 빼낸다. 연구진은 이를 ‘탈가스제’ 첨가로 대체했다. 재질이 더 단단해져 주조 과정에서 잘 깨지지 않는다. 현재 1kg에 100mg 정도 소량의 기포만 남는 수준인데, 앞으로 기포가 아예 생기지 않는 전통 유기를 만드는 것이 목표다. 한호규 단장은 “전통 소재를 현대 기술과 융합하면 우리 문화가 재생산되며 새롭고 나은 것을 창조하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말했다.
 
권예슬 동아사이언스 기자 yskwo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