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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이상훈]다시 기회가 넘치는 나라로

입력 | 2017-01-03 03:00:00


이상훈 경제부 차장

 “부(富)와 명예에 이르는 길은 모두에게 열려 있다. 의지를 가진 자는 모두 그 길에 들어설 수 있다.”

 1843년 발간된 미국 최초의 공립 초등학교 교과서 ‘맥거피스 리더(McGuffey's Reader)’는 기회의 평등을 국가의 최우선 가치로 내세우며 이같이 서술했다. 미국을 세계 최강대국으로 만든 힘의 원천인 ‘아메리칸 드림’은 이런 가치관을 토대로 쌓아올려진 신념이었다. 1977년 퓰리처상을 수상한 미국의 역사학자 데이비드 M 포터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미국이 누린 풍요가 “역사상 그 어떤 시대보다 더 많은 기회의 평등이 허락됐기에 가능했다”고 진단했다.

 아메리칸 드림 못지않게 기회가 넘치는 축복을 누린 또 하나의 나라가 있었다. 바로 대한민국이다. 일제강점기와 혼란스러운 해방정국, 6·25전쟁 등을 겪으며 나라는 잿더미가 됐지만 잘살아 보겠다는 생각은 꺾이지 않았다. 모두가 가난해 역설적으로 누구에게나 ‘기회의 문’이 열려 있던 시대였다.

 무한한 기회와 명확한 보상이 결합한 ‘한국형 성장모델’은 1990년대 이후 세계화와 외환위기를 겪으며 망가져 갔다. 성장 정체와 기득권층의 이기적 행태가 맞물려 중산층으로 올라설 수 있는 기회는 갈수록 줄어들었다. 그나마 남은 기회마저 개인의 노력보다 집안 배경이나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불공정하게 나눠지고 있다.

 교육 현장에서 기회의 불평등은 이미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 된 지 오래다. 필자가 지방의 한 외국어고에 다녔던 20여 년 전과 지금은 큰 차이가 있다. 아버지가 변호사인 아이와 동네 슈퍼마켓을 운영하는 부모님의 아들, 법인택시를 운전하는 아버지의 딸이 한 교실에서 공부했다. 고액 과외는 부잣집 친구 몇 명만 받았을 뿐이고 대부분 오후 11시까지 계속된 스파르타식 보충수업과 자율학습으로 입시를 준비했다. 사교육을 받은 아이들보다 진득하게 교실에서 공부하던 친구들의 결과가 더 좋았다. 택시운전사 딸은 사법시험에 합격해 판사가 됐고 슈퍼마켓 아들은 번듯한 고교 교사가 됐다.

 지금은 어떨까. 한국개발연구원(KDI)이 2004년 중학교 3학년이었던 1731명의 대입 결과를 추적해 분석한 결과 상위 9개 대학의 소득 1분위(하위 20%) 진학률(0.4%)과 5분위(상위 20%) 진학률(10.0%) 차이가 무려 25배나 됐다.

 좁아진 ‘기회의 문’은 계층 이동의 통로인 취업시장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난다. 통계청에 따르면 2004년 이후 12년간 늘어난 505만 개의 일자리 가운데 대기업 정규직은 13.6%에 불과했다. 대기업과 중소기업,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의 임금 격차는 벌어졌다. 더 나은 일자리로 옮기는 문은 좁아졌고 계층 이동은 어려워지고 있다.

 동아일보의 신년기획 ‘외환위기 20년, 기회의 문을 넓히자’는 이런 현실을 방치해선 안 된다는 공감대 형성을 위해서 마련됐다. 안타깝게도 외환위기 이후 20년간 한국 사회의 불평등 담론은 소득 양극화 문제에만 집중됐다. 정작 열심히 노력해 더 나은 삶을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어떻게 고른 기회를 제공할지에 대해선 논의조차 없다.

 열심히 일해도 결과가 달라지지 않을 것이라는 실망감에 휩싸인 나라에 미래는 없다. 특권을 쥔 비선 실세의 국정 농단으로 망가져 버린 시스템을 바로잡는 일은 공정 경쟁을 보장하겠다는 정부와 사회 지도층의 다짐으로 시작해야 한다. 대한민국의 미래를 결정할 중요한 변수 가운데 하나는 기회의 평등을 보장하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이상훈 경제부 차장 januar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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