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홍기선 감독의 감독 데뷔작인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1992년) 촬영 현장. 가운데 모자를 눌러쓴 이가 30대 초반이던 홍기선 감독이다. 동아일보DB
18일 오후 안훈찬 미인픽쳐스 대표의 목소리는 무거웠다. 15일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홍기선 감독의 장지에서 나오던 길에 전화를 받은 그에게 뭔가를 묻는 게 염치없었다. 고인의 유작을 제작한 안 대표는 “12일 영화 촬영을 마치고 한 ‘쫑파티’ 때도 너무 건강해 보여 이런 일이 벌어질 거라곤 상상도 못 했다”며 말을 잇지 못했다.
1987년 영화제작집단 ‘장산곶매’ 창립 멤버인 홍 감독은 5·18민주화운동을 다룬 ‘오! 꿈의 나라’(1989년)를 제작하며 영화계에 첫발을 내디뎠다. 인신매매 불법 어선을 소재로 한 감독 데뷔작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1992년)부터 고인은 줄곧 약자의 편에 서서 사회성 짙은 작품을 선보였다.
9일 촬영을 종료한 ‘일급기밀’도 그랬다. 이 작품은 2002년 차세대전투기 외압설을 폭로했던 조주형 전 공군 대령과 2009년 계룡대 군납문제를 알렸던 김영수 전 해군 소령의 실화에서 모티브를 얻었다. 군 내부 비리로 고심하던 장교(김상경)가 방송국 여기자(김옥빈)의 도움을 얻어 진실을 규명한다는 줄거리. 안 대표는 “2009년 ‘이태원 살인사건’ 개봉 뒤 지금까지 ‘일급기밀’에 모든 정성을 쏟았다. 이번 영화야말로 대중에게 좀 더 다가갈 작품이 될 거란 기대가 컸다”며 안타까워했다.
“술잔을 기울이며 제작진 출연진 모두 ‘참 신기한 작품’이란 평이 많았습니다. 촬영 내내 날씨 같은 예상외 변수로 인한 촬영 연기가 한 번도 없었어요. 감독님도 ‘연출 인생에 처음 있는 일’이라며 놀라워했습니다. 9월 23일 크랭크인 들어가기까지 워낙 고생해서 보상받은 거 같다며 웃어넘겼는데…. 지금 돌이켜보니 감독님의 마지막 작품이라 하늘도 도와줬나 싶습니다.”
영화 ‘일급기밀’의 개봉일은 아직 정해지지 않았다. 선장이 떠나간 영화의 후반 작업은 어쩌면 더뎌질 수도 있다. 하지만 안 대표는 “내심 감독님은 3, 4월엔 관객에게 선보일 수 있길 바랐다. 부담스럽지만 그 소망을 이뤄 주는 게 남은 이의 몫이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꽃피는 봄이 오면 평생 영화에 바친 그의 열정도 은막에 피어나길. 삼가 조의를 표한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