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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양반가서도 재테크 했다

입력 | 2016-09-27 03:00:00

문숙자 박사 연구서 통해 밝혀




 대(代)가 끊기지 않고 조상에 대한 제사가 계속되는 것이 지상 과제였던 조선의 양반가에 어느 정도 이상의 재산은 필수다. 그러나 여러 명의 자녀가 재산을 균분 상속했기에 후대로 내려갈수록 재산 규모는 당연하게 작아질 가능성이 크다. 실제 조선 후기 수많은 양반이 영세한 소농으로 변모하기도 했다.

 최근 출간된 문숙자 서울대 법학연구소 책임연구원(전 한국학중앙연구원 연구교수)의 ‘조선 양반가의 치산(治産)과 가계경영’(한국학중앙연구원)을 중심으로 양반가의 ‘재테크’를 알아봤다.

○ 팽창형 경영―집중적 토지 매매

 이 책에 따르면 공격적으로 재산을 불린 집안은 연동(蓮洞) 해남 윤씨 집안이 대표적으로 꼽힌다. 윤효정(1476∼1543)의 후손들로 윤선도(1587∼1671) 윤두서(1668∼1715) 등을 배출한 명문이면서 ‘국부(國富·나라에서 손꼽히는 부자)’로 불렸던 집안이다.

 이 집안은 특정 지역의 토지를 집중적으로 사는 방식으로 재산을 늘렸다. 남아 있는 토지 매매 문서 305점 중 301점이 해남 지역 내의 땅을 거래한 기록이다. 대부분 종가가 있는 해남읍 남쪽의 현산면과 화산면에 집중됐다. 또 16∼18세기에는 이 지역의 해택(海澤·갯벌)을 대규모로 개간하기도 했다. 문 연구원은 “토지를 상속할 때도 쪼개지 않고 지역 단위로 물려줘 재산으로서의 가치를 유지했다”며 “거주지와 멀어 관리가 어려운 땅을 파는 이매(移買)도 많았다”고 말했다.

 전근대 시대 토지와 함께 주요 재산이었던 노비의 관리도 꼼꼼했다. 윤선도가 한글로 쓴 ‘노비성책, 신유년(1621년)’에는 ‘(노비로부터) 선물(膳物)은 참깨 닷 되씩 받아라’ ‘늙은 종들로 공물(貢物)이 면제된 이도 선물은 받아라’ 등의 내용이 나온다. 물론 이 집안은 노비와 지역민 구휼에 관한 미담도 적지 않다.

○ 안정형 경영―상속인들의 공동 재산 관리

고산 윤선도가 남긴 ‘충헌공(윤선도의 시호) 가훈’에는 ‘앙역노비(仰役奴婢)는 두터이 구휼해야 한다’ ‘배로 짐을 실어 나를 때 노비에게 적절한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 등 노비 관리에 관한 구체적인 내용이 담겨 있다. 문숙자 연구원 제공

 영해(寧海) 재령 이씨 집안은 16세기 경상도 영해에 살기 시작한 이애(1480∼1561)의 후손이다. 노비 750여 명을 소유한 대부호에서 16세기를 전후해 중소지주로 변모했지만 이후에도 재지사족(在地士族·향촌을 지배하던 양반층)으로서 안정적인 가계 운영을 했다. 임진왜란 때는 노비를 반값에 사들이면서 줄어든 가산을 다시 늘리기도 했다.

 재령 이씨 집안도 노비를 가족이 공동 관리하는 등 철저히 관리했다. 도망 노비를 추쇄(推刷·조사하고 찾는 일)한 상속인에게는 그 노비를 쓸 권리를 줘 추쇄를 독려했다. 안승준 한국학중앙연구원 책임연구원은 “진주의 재령 이씨 집안이 했던 대규모 목축업이나 임산업은 근대적 경영과도 유사한 모습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 조선 후기에도 장자(長子) 단독 상속은 없다?

 문 연구원은 통념과 달리 조선 후기에도 장자 단독 상속이 이뤄졌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고 했다. 조선 전기에는 자녀들이 돌아가면서 제사를 모시는 윤회봉사(輪廻奉祀)와 함께 균분 상속이 이뤄졌지만 후기 종법(宗法)적 가족제도가 도입되면서 상속방식도 변했다고 알려져 있다. 문 연구원은 “제사에 필요한 재산을 종손에게 모아주면서 재산이 집중되는 경향은 확인할 수 있지만 이 재산은 마음대로 처분할 수 없기 때문에 상속분과 성격이 다르다”고 말했다.

조종엽 기자 jjj@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