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밍웨이 죽이기:엘러리 퀸 앤솔러지/버트런드 러셀 등 지음/엘러리 퀸 엮음·정연주 옮김/408쪽·1만4500원·책읽는섬
범죄 소설은 즉각적인 흥미를 불러일으키는 동시에 인간의 다층적 측면을 조명한다. 몽환적이고 고독한 분위기로 추리소설가에게 영감을 불어넣은 화가 조르조 데 키리코의 ‘거리의 신비와 우울’. 동아일보DB
제목이나 작가의 이름을 보고 손가는 대로 펼쳤다. 개성 강한 글쟁이들의 면면만큼이나 작품의 결도 제각각이다. ‘설탕 한 스푼’(윌리엄 포크너)은 조엘 플린트라는 사내가 아내를 죽였다고 자수하는 것으로 시작된다. 플린트는 감옥으로 가지만 곧 연기처럼 사라진다. 괴팍한 프리첼 영감은 딸이 죽고 사위가 사라진 후 집에 칩거한 채 챙겨주러 찾아오는 이웃들에게 성질만 낼 뿐이다. 눈치 빠른 이라면 어찌된 상황인지 알아채기 어렵지 않지만 진실이 드러나는 장치가 신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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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드나무 길’(싱클레어 루이스)에는 1인 2역을 하며 치밀한 계획을 세워 원하는 바를 손에 쥐지만 허망함에 빠지는 주인공이 등장한다. 다시 되돌리려 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는 블랙 코미디 같은 상황을 통해 인간이란 존재의 심리를 파헤친다. ‘사인 심문’(마크 코널리)과 ‘기밀 고객’(제임스 굴드 커즌스)은 마지막에 깜짝 반전을 선사한다.
‘헤밍웨이 죽이기’(매킨레이 캔터)는 제목 때문에 내용이 정말 궁금했다. 갱단 두목과 경찰의 추격전을 그렸는데, 두목 이름이 체스터 헤밍웨이다. 아, 낚인 기분이다. 1934년에 출간했다는데 그 시절에도 ‘낚시’란 게 있었던 걸까. 아니면 어니스트 헤밍웨이에 대한 일종의 비틀기였을까.
한층 빠르고, 더 복잡하고 치밀하게 전개되는 요즘 범죄 소설에 익숙한 독자에게는 다소 예스러운 느낌을 줄 것 같다. 여유롭게 흘러가는 흑백 영화를 보는 느낌이랄까. 물론 흑백 영화도 나름의 멋이 있는 법.
범죄·미스터리물을 전문적으로 쓰지 않았던 유명 작가들이 이런 작품에 도전했다는 사실 자체가 흥미롭다. 다만, 몇몇 단편은 읽다 보면 세계적인 작가라 해도 모든 작품을 다 잘 쓰기란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진리를 새삼 확인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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