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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균의 휴먼정치]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릴 사람은 없다

입력 | 2016-08-04 03:00:00


박제균 논설위원

한나라당 이회창 대선후보가 의심의 여지없는 ‘미래 권력’이던 시절, 아침마다 그의 책상엔 밀봉된 보고서가 올라갔다. 겉봉엔 ‘對外秘(대외비)’라는 붉은 한자 도장이 찍혀 있었다. 대통령 보고서 양식을 본뜬 것이다. 작성자는 국가안전기획부 출신 A 의원. 그는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정보통이었다. 이 후보에게 ‘보험’을 들려는 정보기관 관계자들은 A 의원에게 몰렸고, 그만큼 보고서의 신빙성이 높았다.

국정원장 獨對 검토해야

권력에 누수가 생길까 봐 의심 많은 권력자들은 너나없이 정보의 마력에 빠진다. 1997년 대선에서 이 후보에게 이긴 김대중(DJ) 대통령도 보고서 중독 수준이었다. 해외 순방이라도 다녀오면 밀린 보고서부터 찾기 바빴다. DJ는 작성자의 판단이 개입된 보고서는 신뢰하지 않았다. 박근혜 대통령도 일과를 마치고 관저에까지 보고서를 들고 간다. 보안을 중시하는 박 대통령은 대선후보 시절 직접 손으로 쓴 보고서를 신뢰했다. 타이프로 친 보고서는 복수로 출력됐을 것이란 의심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보고서엔 인간의 육성(肉聲)이 없다. 역대 대통령들은 여러 채널의 만남으로 이를 보완했다. 중요한 회동이 정보기관장 독대(獨對)였다. DJ 때까지 이어진 국정원장 주례보고는 노무현 대통령 때 끊어졌다. 이명박 대통령은 매주 금요일 국정원장을 독대했다. 그러나 박 대통령에 와서 다시 끊겼다. 국정원에서 매일 올리는 보고서 역시 다른 부처 보고서와 마찬가지로 정호성 제1부속비서관 같은 측근을 거쳐 대통령에게 전달된다.

DJ 정부에서 민정수석비서관을 지낸 김성재 전 문화관광부 장관은 박 대통령도 국정원장을 독대할 필요가 있다고 제언한다. “국정원장이 무슨 보고를 할지 몰라 공직사회의 긴장을 불러일으킨다. 통치에 효율적으로 활용할 수 있다.” 누가 뭐래도 국정원은 대한민국 최고 최대의 정보기관이다. 측근의 손을 거친 문건으로 보고받기보다는 이병호 원장의 육성을 들을 필요가 있다.

군과 검찰을 신뢰하는 것으로 알려진 박 대통령이지만, 그쪽 사람들을 따로 만나는 일도 드물다. 군 정보기관인 기무사령부는 독재 시절 나는 새도 떨어뜨렸던 보안사의 후신. 그러나 이재수 전 기무사령관은 사령관 시절 박 대통령과 독대한 일이 없다고 한다. 동생인 박지만 EG 회장과 육사 37기 동기이자 ‘절친’이어서 오히려 불이익을 받았다고나 할까.

박 대통령은 최근 “저도 무수한 비난과 저항을 받고 있다”며 “이 상황에서 대통령이 흔들리면 나라가 불안해진다”고 말했다. 참모들에게는 “고난을 벗 삼아 당당히 소신을 지켜나가라”며 “소명의 시간까지 의로운 일에는 비난을 피해 가지 말라”고 당부했다. 우병우 민정수석비서관을 비호하는 말이 아니냐를 두고 논란이 있었지만, ‘비난’ ‘저항’ ‘고난’ ‘소명’ 등 마치 ‘성전(聖戰)’에 임하는 듯한 단어 선택은 심상치 않다.

권력자의 자기 합리화 위험

임기 말 지지율이 10%대까지 떨어진 노무현 전 대통령은 역사 얘기를 많이 했다. “세종은 성군이었지만 세상을 바꾸지 못했다” “조선 500년을 지배한 혁명을 성공시킨 사람은 정도전이다”…. 국민은 안 알아 줘도 역사는 평가해줄 것이란 기대 때문이었을까. 권력자가 민심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기 합리화를 하는 것은 위험한 일이다. 자신에 대한 비판을 ‘비난’이나 ‘저항’으로 받아들여, 현재의 ‘고난’을 극복하는 것이 ‘소명’이라고 여겨선 곤란하다. 대통령의 눈과 귀를 가리는 사람은 대통령 자신이다.

박제균 논설위원 phar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