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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옥에 살다/장명희]‘페트병에어컨’소동과 해인사 건축술

입력 | 2016-08-02 03:00:00


장명희 한옥문화원장

무더위가 시작될 무렵, 전기를 사용하지 않고 실내 온도를 5도나 낮출 수 있는 에어컨이 나왔다는 소식이 화제가 됐었다. 창문 크기의 패널에 바닥 부분을 잘라낸 페트병 수십 개의 주둥이를 집 안쪽으로 향하게 붙여서 모으면, 넓은 통로를 지나던 공기가 좁은 통로를 만나 흐름이 빨라지면서 압력에 변화가 생기고, 그러다가 이 좁은 통로를 빠져나오게 되면 갑자기 팽창하면서 공기 온도가 내려가게 된다는, 이른바 ‘페트병 에어컨’이다.

처음엔 획기적인 아이디어라고 많은 관심을 받았지만 과학자들은 “열역학 기본 원리는 그렇지만 일반적인 바람 정도의 압력으로는 냉각 효과를 얻을 수 없다”고 잘라 말해, 무더위를 앞둔 사람들의 호기심은 바람이 빠지고 말았다.

‘냉각’ ‘에어컨’이라는 용어가 주는 자극의 강도로 대중의 기대를 지나치게 높인 것이 문제랄까, 맞은편에 공기가 빠져나갈 통로가 있다면 냉각까지는 몰라도 온도가 내려가는 효과는 분명히 있다. 넓은 통로를 지나던 공기가 좁은 통로를 만나 흐름이 빨라지면서 속도가 생겨 ‘바람’이 일기 때문이다. 과학자들은 ‘베르누이의 정리’라고 부르지만 우리 선조들은 예부터 일상으로 활용하던 삶의 지혜다.

더운 날 뒷산의 바람은 대청 뒷벽 바라지를 통과하며 속도가 생기고, 대청은 시원한 바람이 솔솔 부는 쾌적한 장소가 된다. 당연한 장면으로 여겨지지만 그 속에는 바람 골의 방향이며 세기를 고려한 집의 배치 등 많은 궁리가 응축되어 있다.

조선 초기에 건립된 것으로 추정되는 해인사 장경판전(藏經板殿)은 우리의 전통건축이 자연에 어떻게 적응하며, 자연을 어떻게 활용하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다. 장경판전은 가야산 중턱에 위치한 해인사의 가장 뒤쪽 제일 높은 곳에 있다. 북쪽이 높고 남쪽이 아래로 열려 있는 지형인데 서남향으로 앉혀져 있다. 그러니 남쪽 아래에서 북쪽으로 불어 올라간 바람, 특히 습기가 많은 여름 동남풍은 판전을 타고 돌아 옆으로 흘러나간다.

또 판전의 남쪽 벽은 아래 창이 크고 위 창이 작으며, 북쪽 벽은 아래 창이 작고 위창이 크다. 남쪽의 아래쪽 큰 창으로 들어온 바람이 경판 사이를 두루 돌아 위로 올라가 북쪽의 위쪽 큰 창으로 빠져나가면서 온도와 습도가 고르게 분포되도록 하는 구조적 장치다. 또 남쪽 아래 창이 커서 판전 바닥에 햇볕을 많이 받아 살균효과가 있으며 위 창이 작으니 경판에 직사광선을 막아준다.

여기에 건물 바닥에 소금 숯 횟가루 모래 찰흙을 섞어서 다져 넣어 비가 많이 내릴 때는 습기를 빨아들이고 건조할 때는 흙 속에 있는 수분을 내보내 경판과 건물이 적절한 습도를 유지하도록 돕는다.

입지, 건물 배치, 구조적 장치로 공기의 흐름을 유도하고, 거기에 재료의 성능이 더해져 완성된 통풍과 제습 체계가 경판의 변형을 최소화한 덕분에 8만 장이 넘는 경판은 오늘날까지 제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장경판전은 ‘세계유산’으로, 팔만대장경판은 ‘세계기록유산’으로 유네스코(UNESCO)에 등재되어 인류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보편적 가치를 세계에 드러내고 있다. 우리의 국보임은 말할 것도 없다.

‘페트병 에어컨’은 한바탕 소동으로 지나갔지만 자연의 원리에서 답을 찾는 삶에 대한 사람들의 갈망을 확인하기에는 충분했다.

해인사 장경판전은 1975년에 항온·항습·방충시설을 갖춘 현대식 건물을 짓고 목판을 옮겼으나 얼마 지나지 않아 습기가 차고 곰팡이가 생기며 뒤틀림이 발생해 되돌아 왔다는 건 잘 알려진 이야기다. 인공적인 환경 제어가 자연 조건에 적응하고 활용하기보다 기능적으로 더 우수하지는 않다는 증거가 된다.

자연 바람이 잘 불어주는 곳은 한여름 에어컨이 없어도 얼마나 시원한지 경험한 이들은 안다. 인공 냉방과는 결이 다른 시원함이다. 게다가 에너지 사용도 줄일 수 있으니 지구 환경의 지속 가능성과도 다른 말이 아니다.

터가 가진 자연 조건을 잘 활용하고 부족한 요소는 보완하는 것이 ‘환경친화’적인 삶을 누리는 길이며, 그 삶을 ‘지속 가능’하게 하는 길이다. 현대인들이 한옥에 열광하는 이유도 그런 삶에 대한 기대 때문이 아닐까.

장명희 한옥문화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