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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박중현]양적완화, 누구 부담이 맞나

입력 | 2016-05-19 03:00:00


박중현 소비자경제부장

4·13총선의 새누리당 공약으로 등장한 ‘한국형 양적완화’는 한국은행의 발권력을 동원해 국책은행 자본을 늘리고 이를 산업 구조조정 재원으로 쓰자는 아이디어다. 이 공약을 내걸고 선거에 승리하면 국민 동의를 얻은 것으로 치고 한은법을 고쳐 조선, 해운산업 구조조정 자금을 조달한다는 계획이었다.

여당이 선거에서 지면서 물 건너간 것처럼 보이던 이 방안은 지난달 말 박근혜 대통령이 필요성을 강조하자 되살아났다. 곧바로 한은은 “국책은행 자본 확충은 재정의 역할”이라며 반기를 들었다. 특히 한은이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다’라고까지 주장하자 선거 참패로 신경이 곤두선 정부, 여당은 “여소야대를 틈타 한은이 ‘독립운동’을 한다”며 발끈했다.

이어 구조조정 재원을 한은과 정부 어느 쪽이 부담해야 할지 경제 전문가들 사이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어느 쪽이든 국민 부담이라 무의미한 ‘주머닛돈이 쌈짓돈’ 논쟁 같지만 꼼꼼히 따져 보면 차이가 적지 않다.

가장 큰 차이는 국가부채 문제다. 한은이 찍어내는 돈은 국가부채에 잡히지 않는다. 반면 정부가 돈을 대면 국가부채 증가가 불가피하다. 재정적자가 계속 커지는 현실을 고려하면 한은 부담이 맞아 보인다. 돈 낼 사람도 다르다. 한은이 돈을 찍어 통화량이 늘면 인플레이션(물가 상승) 압력이 생기고, 화폐 가치 하락만큼 현금 등을 보유한 전 국민이 나눠서 부담하게 된다. 이른바 ‘인플레이션 택스(Inflation Tax)’다. 이와 달리 재정 부담은 세금 내는 사람에게만 돌아간다. 지난해 소득세를 낸 근로소득자는 2명 중 1명(51.9%)뿐이다.

그렇다면 부담 정도가 관건이다. 올해 3월 현재 시중통화량(M2)은 2296조 원. 10조 원 규모의 구조조정 자금이 물가를 올릴 가능성은 대단히 낮다. 인플레이션 택스가 발생하지 않을 공산이 크다는 뜻이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 수준에 머물러 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하락)이 걱정되는 지금 약간의 인플레이션은 오히려 고마운 일이다. 역시 한은 부담이 국민에게 유리한 셈이다.

부담하는 세대도 다르다. 한은이 돈을 찍어내면 돈이 많은 기성세대가 더 큰 부담을 진다. 반면 재정을 써 국가부채가 늘면 미래 세대에 부담이 전가된다. 제조업 호황기의 과실을 누린 기성세대가 구조조정의 부담을 지는 게 옳은 일이다. 환율 조작과 관련해 미국이 한국을 ‘관찰 대상국’으로 지정한 상황에서 돈을 풀어 원화 가치를 떨어뜨리려 한다는 비판을 피하는 데에도 한은이 돈 대는 쪽이 유리하다. 선진국 중앙은행들이 이미 자국 경제구조 문제 해결에 발권력을 동원한 적이 많기 때문이다.

이주열 한은 총재가 ‘자본확충펀드’를 통해 간접적으로 국책은행 자본 확충에 참여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양측의 의견 차는 좁혀졌다. 다만 ‘단기 대출’ 형식으로 하고, 정부가 지급보증을 서야 한다고 한은이 고집해 막판 힘겨루기가 벌어지고 있다. 정부 지급보증은 국가부채로 잡히기 때문에 논의가 원점으로 돌아간다. 단기 대출도 양적완화 효과를 반감시킨다.

늑장 구조조정으로 사태를 악화시킨 정부, 국책은행 등은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이와 별도로 돈을 어디서 낼지는 철저히 국가경제의 득실을 따져 결정해야 한다. 한국 경제에 닥친 문제가 수십 년에 한 번 생길 산업 시스템 개편이란 점을 고려할 때 한번 허용하면 정부, 여당이 수시로 발권력을 동원할 것이란 한은의 우려는 과해 보인다.

사상 초유의 양적완화 정책으로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서 세계 금융 시스템을 지킨 벤 버냉키 전 미 연방준비제도(Fed) 의장은 당시를 회고한 자서전에 ‘행동하는 용기’란 제목을 붙였다. 지금 한은에 필요한 건 가본 적 없는 길에 나설 용기다.

박중현 소비자경제부장 sanjuck@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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