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현 소비자경제부장
여당이 선거에서 지면서 물 건너간 것처럼 보이던 이 방안은 지난달 말 박근혜 대통령이 필요성을 강조하자 되살아났다. 곧바로 한은은 “국책은행 자본 확충은 재정의 역할”이라며 반기를 들었다. 특히 한은이 ‘국민적 합의가 필요하다’라고까지 주장하자 선거 참패로 신경이 곤두선 정부, 여당은 “여소야대를 틈타 한은이 ‘독립운동’을 한다”며 발끈했다.
이어 구조조정 재원을 한은과 정부 어느 쪽이 부담해야 할지 경제 전문가들 사이에서 격론이 벌어졌다. 어느 쪽이든 국민 부담이라 무의미한 ‘주머닛돈이 쌈짓돈’ 논쟁 같지만 꼼꼼히 따져 보면 차이가 적지 않다.
광고 로드중
그렇다면 부담 정도가 관건이다. 올해 3월 현재 시중통화량(M2)은 2296조 원. 10조 원 규모의 구조조정 자금이 물가를 올릴 가능성은 대단히 낮다. 인플레이션 택스가 발생하지 않을 공산이 크다는 뜻이다. 소비자물가 상승률이 1% 수준에 머물러 디플레이션(경기 침체 속 물가 하락)이 걱정되는 지금 약간의 인플레이션은 오히려 고마운 일이다. 역시 한은 부담이 국민에게 유리한 셈이다.
부담하는 세대도 다르다. 한은이 돈을 찍어내면 돈이 많은 기성세대가 더 큰 부담을 진다. 반면 재정을 써 국가부채가 늘면 미래 세대에 부담이 전가된다. 제조업 호황기의 과실을 누린 기성세대가 구조조정의 부담을 지는 게 옳은 일이다. 환율 조작과 관련해 미국이 한국을 ‘관찰 대상국’으로 지정한 상황에서 돈을 풀어 원화 가치를 떨어뜨리려 한다는 비판을 피하는 데에도 한은이 돈 대는 쪽이 유리하다. 선진국 중앙은행들이 이미 자국 경제구조 문제 해결에 발권력을 동원한 적이 많기 때문이다.
이주열 한은 총재가 ‘자본확충펀드’를 통해 간접적으로 국책은행 자본 확충에 참여하겠다는 뜻을 밝히면서 양측의 의견 차는 좁혀졌다. 다만 ‘단기 대출’ 형식으로 하고, 정부가 지급보증을 서야 한다고 한은이 고집해 막판 힘겨루기가 벌어지고 있다. 정부 지급보증은 국가부채로 잡히기 때문에 논의가 원점으로 돌아간다. 단기 대출도 양적완화 효과를 반감시킨다.
늑장 구조조정으로 사태를 악화시킨 정부, 국책은행 등은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 하지만 이와 별도로 돈을 어디서 낼지는 철저히 국가경제의 득실을 따져 결정해야 한다. 한국 경제에 닥친 문제가 수십 년에 한 번 생길 산업 시스템 개편이란 점을 고려할 때 한번 허용하면 정부, 여당이 수시로 발권력을 동원할 것이란 한은의 우려는 과해 보인다.
광고 로드중
박중현 소비자경제부장 sanjuc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