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경준 사회부장
당장 ‘소통’이 힘들어졌다. 잘 아는 사람일 것으로 추정되는 누군가가 “난데, 그날 올 수 있지?”라 물으면 어색하게 “실례지만 누구세요?”라고 되물었다. 반대로 내가 먼저 연락하려면 가족이라 해도 전에 쓰던 휴대전화에서 일일이 주소록을 찾아야 했다.
안타까운 마음에 옛 기기에 저장된 이름들을 하나하나 찍으며 그 주인을 떠올렸다. 나는 명함을 받으면 조금이라도 기억할 수 있도록 일일이 손으로 입력하곤 한다. 특히 e메일 ID가 특이하면 도움이 된다. 예컨대 나이 지긋한 분이 ‘○○○○58@XXXXX.com’이라는 ID를 사용하면 ‘58년 개띠인가 보다’ 생각하며 머릿속 저장장치에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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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만난 초등학교 친구가 그랬다. 지방법원 부장판사를 끝으로 법복(法服)을 벗고 변호사 개업한 그 친구의 명함에는 휴대전화 번호가 없었다. 이유를 묻자 “아이고 귀찮아서. 이런 일 하다 보면 골치 아픈 일이 얼마나 많은데…”라며 손사래를 쳤다. “어찌 됐건 네 앞길에 돈다발이 쫙 깔리기를 바랄게”라고 했지만 속으로는 ‘이젠 너도 갑(甲)이 아닌데, 이 험한 세상을 어떻게 살래?’라고 충고해주고 싶었다.
일전에는 모 대학 대외협력처장과 명함을 주고받았다. 대학 대외협력처장은 기업으로 치면 홍보실장과 같다. 정부, 국회, 언론, 시민단체 등 외부와 소통하면서 자신이 몸담고 있는 대학에 유리한 환경을 조성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 하는 자리다. 그런데 그의 명함에도 휴대전화 번호가 없었다. 심지어 휴대전화 번호를 담은 명함, 뺀 명함을 다 갖고 다니며 상대에 따라 어느 것을 건넬지 ‘간’을 보는 사람도 있다고 한다.
명함에 휴대전화 번호가 없는 사람들을 추려보니 한 가지 공통점을 찾을 수 있었다. 나도, 그도 연락 한번 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가 나에게 왜 연락하지 않았는지는 알 수 없지만 내가 안 한 이유는 분명하다. 소통하기 싫어 휴대전화 번호를 가르쳐주지 않는 사람에겐 마음이 가지 않기 때문이다.
내일은 제20대 국회의원 선거일이다. 후보마다 허리를 90도로 굽히며 지역 주민, 또 국민의 작은 목소리에도 귀 기울여 소통하겠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그러나 이맘때 아니면 받아보기도 힘든 그들의 명함에는 인자한 얼굴 사진, 자랑스러운 학력과 경력, 지키지도 못할 공약이 빽빽하지만 휴대전화 번호를 넣은 후보는 손에 꼽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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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준 사회부장 news91@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