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신영 과학동아 편집장
물론 안다. 가운데 둥근 문양은 알파고를 만든 구글 딥마인드사의 로고이고, 알파고는 거기에 바둑알을 둘러 자신의 정체성을 드러냈다는 것을. 대국 때마다 그 로고는 화면 너머로 응시하듯 나를 쳐다봤고, 나는 어느 순간부터 그 그림의 존재가 무척 신경 쓰였다.
문장(紋章)이라고 할까. 문장은 가문이나 국가를 상징하던 그림이다. 전투라도 벌어지면 서로의 문장을 자존심처럼 내걸고 싸웠다. 그림을 숭배해서가 아니었다. 문장으로 상징되는 가문의 전통과 역사, 자부심을 드러내는 거였다. 깃발 걸고 싸우는 낭만적인 전투 개념이 사라진 지금은 축구 경기 때에나 대리 격인 국기를 볼 수 있다. 그런데 알파고의 로고에서 문장의 부활을 본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자부심을 느껴도 좋을, 어떤 분야를 만들고 선도하는 강력한 ‘진짜’들만의 아우라가 풍기는 문장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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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문장이 있나 생각해 본다. 물론 한국에도 수많은 연구소와 연구단, 기술기업이 있다. 대기업 중에는 세계적 수준을 자랑하는 곳도 있다. 하지만 문장이라고 할 만한 것은 거의 떠오르지 않는다. 분야를 개척하고 기술을 선도해본 곳만의 자부심이 담기지 않은 문장은 울림이 크지 않다.
얼마 전 한 물리학자와 대화하다가 이런 질문을 들었다. “한국에 인공지능 전문가가 있긴 하냐”고. 인공지능의 성배인 바둑을 연구하지 않은 게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물론 한국에도 이전부터 꾸준히 연구해 온 훌륭한 현장 연구자들이 있다. 이들은 지금도 언론의 주목과는 상관없이 묵묵히 노력하고 있다. 하지만 이들이 바둑 인공지능을 연구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연구계획서를 쓰는 단계에서 도대체 무슨 쓸모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았을 테니까. 혹은 성공한 해외 사례가 있느냐는 질문을 받고 당황했을 것이다.
안전한 것, 검증된 것만을 과학자들에게 요구하는 분위기가 바뀌지 않는 한, 자랑할 만한 문장을 갖는 일은 요원할 것 같다. 가끔은 “인류의 성취” 운운하며 허세처럼 자랑할 것도 있어야 사는 건데 말이다.
윤신영 과학동아 편집장 ashill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