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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에서/이광표]국보 1호를 바꿔야 한다고?

입력 | 2016-02-19 03:00:00


이광표 오피니언팀장

최근 일부에서 “국보 1호 숭례문을 바꿔야 한다”는 주장을 내놓고 있다. 숭례문은 국보 1호로 적절치 않기에 다른 문화재로 바꿔야 한다는 것이다. “숭례문이 국보 1호로 지정된 것에는 일제강점기의 잔재가 남아 있는 데다 화재 이후 부실 복원되었기 때문에 교체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국보 1호 교체론자들은 새로운 1호 후보로 훈민정음(현재 국보 70호)을 꼽는다. 한글 훈민정음이 우리 민족을 대표하는 독창적인 문화재라는 사실에 어떠한 이의도 없다. 하지만 국보 1호 교체 문제로 넘어가면 모순에 직면한다.

국보 70호는 엄밀히 말하면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훈민정음’과 ‘훈민정음 해례본’은 다르다. 훈민정음은 한글이다. 하지만 국보 70호 훈민정음 해례본은 훈민정음 그 자체가 아니라 훈민정음 해설서다. 교체론자들은 새로운 국보 1호로 훈민정음 자체를 생각하지만 현실에서는 그 해설서를 국보 1호 후보로 내놓고 있다. 모순이 아닐 수 없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1940년 간송 전형필 선생이 안동에서 거금을 주고 수집할 때 맨 앞 두 장이 떨어져 나간 상태였다. 그 후 두 장을 복원해 붙였다. 따라서 100% 온전한 상태는 아니다. 숭례문보다 더 가치가 있는 것으로 국보 1호를 교체해야 한다는 교체론자 논리를 따르면, 현재 해례본보다 더 온전한 상태의 해례본이 발견될 경우 그것으로 국보 1호를 다시 바꿔야 한다. 끝없는 혼란이다.

문제는 또 있다. 국보 70호를 1호로 바꾸면 그 자리는 무엇으로 대체할 것인가. 숭례문을 70호로 할 것인가, 아니면 그냥 비워둘 것인가.

이렇게 국보 1호 교체 주장은 비논리적인 데다 의미도 없다. 국보 1, 2, 3호와 같은 번호는 순위나 가치 우열의 개념이 아니다. 관리를 위한 단순 일련번호다. 학교에서의 출석번호와 같은 것이다. 그런데도 1996년 이후 일정 간격을 두고 교체 주장이 나온다. 번번이 무산되었으면서도 일부에서 자꾸만 교체론을 내놓는다.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국보와 보물 등 지정문화재의 번호를 없애면 된다. 국보 1호 숭례문, 국보 70호 훈민정음 해례본, 국보 180호 세한도가 아니라 ‘국보 숭례문’, ‘국보 훈민정음 해례본’ ‘국보 세한도’로 부르면 된다. 세계에서 정부나 자치단체가 지정 관리하는 문화재에 번호를 붙이는 나라는 우리와 북한뿐이다. 일본에도 번호는 있지만 행정상 내부관리용 번호일 뿐이지 대외적으로는 번호를 전혀 노출하지 않는다.

사실, 정부에서도 번호를 없애는 방안을 검토한 바 있다. 그러나 논의는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다. 번호를 없애는 과정에서 국보와 보물의 가치를 객관적으로 평가해 다시 등급을 조정하는 작업도 함께 해야 하는데, 이것이 워낙 복잡하다는 우려 때문이다. 번호를 없애면 안내판 등을 수정하는 데 수백억 원의 비용이 들어갈 것이라는 걱정도 나온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그러다 보면 부지하세월(不知何歲月)이다.

일단 번호를 없애야 한다. 번호를 없앴다고 정부가 공식 선언하고, 이후 생산하는 정부의 자료나 문서에 번호를 사용하지 않으면 된다. 학교에서 번호를 빼고 가르치도록 하고, 국보 번호를 묻는 문제를 내지 않도록 하면 된다. 동시에 시민사회에도 이런 취지를 전파하면 된다. 안내판이나 기존 자료를 수정하는 것은 급한 일이 아니다. 천천히 고쳐도 된다.

국보와 보물 등의 번호를 남겨 두는 한 무의미한 교체 주장은 또 나올 것이다. 그렇기에 번호를 없애야 한다.

이광표 오피니언팀장 kp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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