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교생이 만난 월스트리트 투자분석가 신순규 씨
시각장애를 극복하고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21년째 투자분석가로 일하는 신순규 씨(가운데)를 국내 최대규모 고교생 신문인 PASS의 학생기자인 박소희 양(서울 대동세무고 1학년·오른쪽)과 김민경 양(서울 진명여고 2학년)이 최근 만났다. 신 씨는 “눈이 안 보이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될 때가 많다”면서 “기술에 매몰되지 말고 본질에 집중하라”고 조언했다.
꿈을 포기하는 것도 방법이다? 세계 경제의 중심, 미국 월스트리트에서 21년째 투자분석가로 일하고 있는 신순규 씨(48·브라운 브라더스 해리먼 자산운용부)가 전하는 메시지다.
그는 1급 시각장애인이다. 9세 때 녹내장과 망막박리로 인해 시력을 잃은 뒤 그의 꿈은 오케스트라 지휘자, 물리학자, 의사, 교수 등으로 바뀌었다.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것은 무엇일까’를 끊임없이 물으면서 결국 투자분석가라는 직업을 선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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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최대규모의 고교생 주간신문 PASS의 학생기자인 서울 대동세무고 1학년 박소희 양과 서울 진명여고 2학년 김민경 양이 최근 한국을 방문한 신 씨를 서울에서 만났다.
3번 포기한 꿈
“시력을 잃고 가장 먼저 ‘오케스트라 지휘자’라는 꿈이 생겼었죠. 꿈을 위해 피아노를 치면서 15세 때 운 좋게 미국 유학 기회도 잡았습니다. 하지만 고교 시절, 처음으로 제 꿈에 대한 회의가 들었어요. 음악을 좋아하지도 않으면서, 음악에 감동을 느끼지도 않으면서 피아노를 치고 있더라고요. 꿈을 고집하는 것이 바보 같은 짓이 아닌가 생각했지요.”(신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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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나 스스로 온전히 일을 해나갔지요. 일주일에 100시간 이상 일하면서 나만의 방법으로 기업을 분석한 뒤 투자할 만한 가치가 있는 기업을 판단하고 결정해 고객들에게 안내하는 일. 재미있었어요. 2003년엔 장애인으론 세계 최초로 공인재무분석사(CFA) 자격증을 취득할 수 있었죠.”(신 씨)
김 양이 “미국 월스트리트는 경쟁이 특히 치열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비장애인들과의 경쟁에서 살아남을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김 양의 질문에 신 씨는 “장애인도 비장애인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다. 바로 ‘상대방이 나를 장애인으로 바라볼 것’이라는 편견이 그것”이라면서 “장애인이라는 이유로 비장애인보다 일을 적게 해도 된다고 생각한 적은 단 한 번도 없다. 주어진 모든 일을 스스로의 힘으로 해내고 노력하는 것만이 비결”이라고 말했다.
미국 월스트리트의 투자은행인 ‘브라운 브라더스 해리먼’ 자산운용부에서 일하고 있는 신순규 씨의 모습. 신순규 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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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차트와 그래프 등 수많은 정보를 분석해내야 하는 직업인 투자분석가. 시각장애로 인한 어려움은 없을까. 신 씨는 “눈이 안 보이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될 때가 많다”고 답했다. 컴퓨터 화면에 나오는 정보들을 점자로 읽는 프로그램인 ‘스크린 리더’를 사용해 일하지만 기업과 관련된 뉴스나 각종 루머 등 다양한 정보들을 모두 확인할 수 없다. 핵심 정보들만 추리다 보니 작은 정보에 휘둘리지 않고 본질에 집중하게 돼 자신만의 분석과 결정에 확신하게 된다는 것.
신 씨는 청소년들에게 “기술에 매몰되지 말고 본질에 집중하라”고 말했다. 진로를 선택할 때도 특정한 기술이나 기교에 집착하지 말고 자신의 능력을 쌓을 수 있는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라는 것이 신 씨의 조언.
“제가 고등학교 다닐 때는 ‘컴퓨터만 할 수 있으면 평생을 먹고 산다’는 말을 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누구나 컴퓨터를 잘하지요. 세상이 변하는 속도가 매우 빠릅니다. 금방 사라질 기술보다 본질적인 것에 집중하세요. 내가 잘하고 좋아하는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특정 분야가 유망하다고 해서 그 분야로 섣불리 진로를 정하지 말고 수학, 과학 철학, 심리학, 인문학 등 본질적인 학문에 집중하면서 새로운 기술을 받아들이고 배울 수 있는 소양을 쌓아보세요.”(신 씨)
눈을 감으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꿈을 몇 번이고 포기하고 재탐색하면서 진정한 꿈을 찾으셨는데 지금도 꿈이 있나요?”(박 양)
박 양의 질문에 신 씨는 “꿈은 평생 갖는 것이다. 새로운 꿈이 있고 그 꿈을 위해 다시 노력하고 있다”고 말했다. 신 씨는 어려운 환경에 있는 아이들을 돕는 활동을 하고 있다. 한국보육원의 아이들을 도와주면서 해당 아이들이 학업에 매진할 수 있도록 현실적인 여건을 마련해주는 활동을 한다. 최근에는 시각장애와 난독증을 가진 학생들에게 녹음 교과서를 제공하는 단체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신 씨는 “함께 일하는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한편 그들을 존중하며 즐겁게 일하고 있지만 ‘돈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일을 한다는 점’이 늘 아쉬웠다”면서 “사회적으로 좀 더 가치 있는 일을 하기 위해 아이들을 돕는 일을 시작했다”고 말했다.
“꿈을 정할 때 그 꿈이 자신에게 또는 주변사람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눈을 감고 한 번쯤 생각해보세요. 눈에 보이는 것들에 집착해 정작 소중한 것들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거나 잊고 살았을 수도 있어요. 눈을 감으면 보이는 것이 의외로 많답니다.”(신 씨)
글·사진 김재성 기자 kimjs6@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