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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추행혐의 20대男, 무죄확정까지 14개월간의 법정 투쟁기

입력 | 2015-11-07 03:00:00

“내가 늑대라니…” 만원 지하철의 악몽




2007년 제작된 일본 영화 ‘그래도 내가 하지 않았어’는 지하철에서 성추행범으로 몰린 주인공 남성이 자신의 무죄를 입증하기 위해 벌인 기나긴 법정 투쟁을 그렸다. 이 주인공은 결국 유죄 판결을 받았다. 하지만 영화와 똑같은 상황이었던 이모 씨(29) 사건의 결말은 달랐다.

사건은 지난해 9월 12일 서울 지하철 1호선 구로역에서 역곡역으로 가던 전동차에서 발생했다. 퇴근시간대인 오후 7시 40분경 이 씨는 구로역에서 내리는 인파에 밀려 잠시 승강장으로 내렸다가 다시 전동차에 올랐다. 만원 지하철이라 승객들이 우르르 몰리는 대로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잠시 후 한 경찰이 나타나 이 씨의 손목을 움켜잡으며 ‘성추행범’으로 지목했다. 이 씨가 전동차에 다시 타는 과정에서 20대 여성 A 씨의 엉덩이에 성기를 대고 밀었다는 것이다. 당시 잠복 중이던 경찰은 이 씨의 거동을 눈여겨보다 이 씨를 현행범으로 붙잡았고, 이를 피해자인 A 씨에게 알려주며 신고를 권유했다.

이 씨는 억울함을 호소하며 무죄를 주장했다. 하지만 1심에서 징역 4개월을 선고받았다. 피해자 진술에 신빙성이 있고 경찰이 현장을 목격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 씨가 범행을 극구 부인하며 반성하지 않는 점도 고려됐다. 이 씨는 “피해자는 범인 키가 165∼167cm 정도라고 진술했는데 내 키는 177cm로 10cm나 차이가 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재판부는 이 씨가 마른 체형에 구부정한 자세라 실제 키보다 작은 인상을 준다며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 씨의 항소심 국선변호를 맡은 이동진 변호사는 피해자 A 씨의 1심 법정 진술에 주목했다. A 씨는 “처음 경찰 조서를 쓸 때 ‘엉덩이를 스치는 느낌이 들었다’고만 적었는데, 경찰이 ‘이러면 너무 약하다’며 성기로 밀었다는 부분을 쓰라고 해서 그렇게 적었다”고 진술했다. 성추행을 했다는 남자의 얼굴도 A 씨가 직접 목격한 게 아니라 경찰이 이 씨를 지목한 데 따른 것이었다. 이 변호사는 만원 지하철에서 이 씨가 A 씨의 엉덩이에 성기를 들이미는 걸 경찰이 직접 목격했다는 진술에도 의구심을 가졌다.

2심 재판부는 혼잡한 지하철에서 발생할 수 있는 불가피한 신체접촉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며 이 씨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재판부는 A 씨가 성추행을 당했다고 생각하게 된 건 경찰의 예단이 개입됐을 가능성이 크다고 봤다. 대법원 1부(주심 고영한 대법관)는 2심의 무죄 판결을 확정했다고 6일 밝혔다. 이 변호사는 “지하철 성추행 사건의 경우 경찰이 피해자에게 사실보다 더 강력한 진술을 유도하는 사례가 많다”며 “이번 사건은 A 씨가 현장에서 느낀 점을 과장 없이 그대로 진술한 덕분에 이 씨의 무죄가 입증될 수 있었다”고 말했다.

조동주 기자 djc@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