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트렌드 생활정보 International edition 매체

‘헤이안시대’ 연 간무王, 왕비부터 재상까지 백제계로

입력 | 2015-06-26 03:00:00

[수교 50년, 교류 2000년 한일, 새로운 이웃을 향해]<9>백제계를 중용한 日王




간무왕은 중국 당나라와 맞먹는 섬세하고 세련된 문화 예술을 꽃피운 헤이안(교토의 옛 이름) 시대(794∼1185년)를 연 사람이다. 794년 수도를 나라에서 교토로 옮겨 1868년 메이지왕이 수도를 지금의 도쿄로 옮기기 전까지 1000년 이상 이어진 ‘교토 수도 시대’를 시작한 주인공이다. 현대 일본인들은 그를 ‘교토의 신(神)’이라 부른다.

일본의 대표적인 수도인 교토와 도쿄로 천도한 왕은 간무왕과 메이지왕이다. 그래서 교토 사람들은 간무왕을 신으로 모시는 헤이안 신궁을 교토에 세웠고 도쿄 사람들은 메이지왕을 신으로 모시는 메이지 신궁을 도쿄에 세웠다.

일본인들 사랑받는 교토 고쇼 교토 고쇼는 간무왕이 교토로 수도를 옮기면서 별궁으로 지어졌지만 1331년부터 500여 년간 정식 왕궁으로 쓰였다. 봄가을에 일주일씩 일반 개방을 하는데 많은 일본인이 이때에 맞춰 찾아온다. 교토=최창봉 기자 ceric@donga.com

○ 효자 중의 효자 간무왕

간무왕의 아버지이자 백제 여인 고야신립(?∼790년)의 남편인 고닌왕(709∼782년)은 일본의 49대 왕으로 61세 환갑의 나이에 왕위에 등극한 입지전적 인물이다. 고닌왕은 나당연합군과 싸우는 백제군을 위해 왜병을 대거 보내 백강(지금의 금강하구) 전투를 함께 치른 38대 덴지(天智·626∼672)왕의 직계 후손이다.

덴지왕 사후 왕권은 아들 고분왕에게 넘어가지만 작은 아버지 덴무의 쿠데타로 죽임을 당한다. 한국판 단종과 세조를 연상시키는 ‘진신(壬申)의 난’으로 왕권은 덴지왕의 동생 덴무(40대)로 옮겨간다. 덴무가(家)는 이후 48대까지 총 9명의 왕을 배출한다.

이런 상황에서 고닌은 왕위 계승을 기대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는 일찌감치 체념하고 전국을 떠돌며 방랑생활을 한다. 이때 만난 여인이 바로 고야신립이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고야신립은 처음엔 외국인이라는 이유로 정실부인 자리에 앉지 못했다. 고닌 왕자의 부인은 45대 쇼무왕의 딸로 고닌왕과는 9촌 간이다. 일종의 근친혼이다. 두 사람은 사이가 좋지 않았다. 부인은 친정아버지가 왕이라는 것을 내세워 몰락한 왕가 후손인 고닌을 무시하기 일쑤였다. 그런데 770년 48대 쇼토쿠왕이 후계자 없이 별안간 숨지면서 왕위는 고닌에게 넘어간다.

61세라는 나이에 왕위에 오른 고닌 왕은 후계 구도에 고민이 컸다. 순리대로라면 정실부인과의 사이에서 낳은 맏아들에게 물려줘야 했지만 고야신립과의 사이에서 얻은 야마베(山部·이후 간무왕)를 더 마음에 두고 있었다. 결국 그는 부인과 맏아들을 왕후와 태자 자리에서 폐위시킨 뒤 10년간 차근차근 야마베에게 후계자 교육을 하고 780년 왕위를 물려준다.

‘교토의 신’ 간무왕 모신 헤이안 신궁 헤이안 신궁은 원래의 교토 왕궁이 불타 없어진 뒤 19세기에 와서 원래 있던 자리에서 동쪽으로 약 3km 떨어진 곳에 60% 크기로 복원한 건물이다. 이곳에 ‘교토의 신’으로 불리는 간무왕의 위패가 모셔져 있다. 교토=최창봉 기자 ceric@donga.com

○ 왕비에서부터 각료까지 계로

간무왕은 왕위에 오르자마자 어머니 고야신립의 지위를 황태부인(皇太夫人)으로 추대해 아버지의 정식 부인으로 만들었다. 790년 어머니가 사망했을 때에는 정식 황태후(皇太后)로 받들고 세상에서 가장 존귀하고 유일한 존재라는 뜻의 ‘천고지일지자희존(天高知日之子姬尊)’이란 시호도 올린다.

간무왕의 왕비들 중에도 백제계 여인이 많았다. 이노우에 미쓰오 교토산업대 고대사연구소장은 “간무왕에게는 왕비가 무려 27명이 있는데 이 중 6∼7명이 백제여인이다. 일본 왕 중 이 정도로 많은 한반도 도래인 부인을 둔 사람은 간무왕 외에는 없었다”며 “그만큼 어머니의 나라인 백제를 사랑했다는 뜻”이라고 했다.

간무왕은 조정에서도 대놓고 백제인들을 중용하고 우대했다. ‘속일본기’에는 어머니의 조카를 재상으로 발탁하는데 백제계로서는 최초였다고 한다. 간무왕은 “능력이 부족한 사람”이라는 주변의 반대가 있자 “외척(外戚)이기 때문에 발탁한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다고 한다. 오로지 외척이라는 이유로 백제인 관료의 직급을 두 단계나 올려 준 경우도 있다. 이와 관련해 김현구 전 고려대 교수는 자신의 저서에서 ‘간무왕이 백제계를 중용했던 것은 당시 핵심 인재들이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는 이렇게 적고 있다.

“간무왕은 어렵게 왕권을 되찾았다. 그가 의지할 것은 부모 양계였고 당시 관료계의 핵심을 이루던 백제계밖에는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공개적으로 백제계와 관계가 깊음을 강조하고 백제계를 우대한 것이다.”

○ 간무왕의 흔적들

교토에는 간무왕의 유적이 많다. 대표적인 곳이 왕궁으로 쓰이던 교토 고쇼(御所)와 간무왕을 신으로 모시는 헤이안 신궁 두 곳이다.

교토 고쇼는 보통 일본 궁내청에 예약을 해야 방문할 수 있지만 1년에 2번, 봄과 가을에 일주일씩 일반 방문객의 입장을 허용한다. 이곳을 찾은 4월 7일은 다행히 일반 개방 마지막 날이었다.

화려하고 아름다운 이 건축물에서도 한반도 도래인들의 흔적을 찾을 수 있었다. 건물을 지을 때 간무왕의 명으로 신라인 건축가 이나베노(猪名部) 가문의 후예들과 백제인 건축가들이 동원됐다고 전해지는 것. 고대 일본은 큰 토목 및 건축 공사를 벌일 때마다 고구려, 신라, 백제 등지에 기술자들을 요청했고 일본과 친교를 맺고 싶어했던 한반도의 국가들도 기꺼이 기술자들을 파견해 줬으니 자연스러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나베노 가문은 신라에서 선진 건축술을 갖고 일본으로 온 도래인들로 왕실 및 사찰 건축에 큰 영향을 줬다. 이나베노 모모요(猪名部百世)는 8세기 말 나라 지역 사찰 도다이(東大) 사의 비로자나대불과 대불전(大佛殿) 건립을 주도해 일본의 고위 관료직에도 올랐다.

도래인의 숨결이 묻어 있어서 그런지 교토 고쇼는 근엄하고 웅장하다기보다 경주의 안압지처럼 소박하고 절제된 신라 유적지와 비슷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기와를 얹어 만든 흙담은 사람 키보다 조금 높은 정도여서 위압감을 주지 않았고 왕의 집무실이나 침소는 노송의 껍데기를 짜 얹어 강원도의 너와집을 떠올리게 했다.

돌아갈 수 없는 먼 길을 건너온 신라의 건축가들은 수도 경주와 닮은 분지에 자리 잡은 교토에 또 하나의 신라를 세우려고 애썼는지도 모른다. 그들은 간무왕의 교토 천도가 도래인의 힘을 강화하기 위한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고 왕궁과 부속 건물인 교토 고쇼를 짓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했다.

1000년을 이어 간 고도(古都) 교토의 첫 출발은 백제인의 핏줄, 신라인의 기술, 고구려인의 신앙이 모두 어우러진 합작품인 셈이다. 비록 후대에 복원됐지만 당시의 건축 양식을 그대로 본뜬 헤이안 신궁에선 헤이안 시대 초기 도래인들의 열정과 고뇌, 고국을 향한 향수(鄕愁)가 함께 느껴졌다. 이들은 이런 복잡한 감정을 섬세한 건축술로 승화시켰고 지금은 양국 간 우정의 상징이 돼 지나가는 사람들의 발걸음을 붙잡고 있다.


 :: 헤이안쿄(平安京) ::

794년 간무왕이 수도로 삼을 당시 교토의 옛 이름. 이때부터 왕 중심의 중앙집권체제가 확립되는 헤이안 시대가 시작됐다. 1868년 메이지왕이 도쿄로 수도를 옮길 때까지 약 1000년간 일본의 수도였다.


교토=하정민 dew@donga.com / 최창봉 기자



관련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