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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영백의 발상의 전환]걸으면서 그리기, 정치에 개입하는 시적 행위

입력 | 2015-05-26 03:00:00


일러스트레이션 김영진 작가

걷기는 인간의 가장 단순한 행위다. 걸음을 동물적으로 표현한 ‘어슬렁대다’란 말이 있듯, 걸음은 거의 행위를 하지 않는 것으로 치부돼 왔다. 그런데 이 ‘무위(無爲)의 노동’이 정치적일 수 있을까.

프랑시스 알리스(Francis Alÿs)는 2004년 예루살렘 자치구를 걸으며 녹색 선을 남기는 퍼포먼스를 했다. ‘녹색 선 Green Line’(2004년·그림)이란 작업의 제목은 중의적이다. 물론 녹색 선은 구멍 뚫린 녹색 페인트통에서 물감이 떨어지면서 생긴 선을 말한다. 동시에 이는 1948년 이스라엘과 요르단 사이 전쟁 후 정전 협상을 벌이면서 이스라엘 대표가 지도 위에 그린 녹색의 휴전선이었다.

작가는 이 휴전선 24km를 이틀 동안 따라 걸으며 58L의 녹색 페인트를 흘렸다. 물감으로 자취를 남기며 조용히 걷는 남자의 모습은 서정적이다. 작가는 이 모습을 담은 비디오를 전시함으로써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및 여러 다른 국가들의 반응과 참여를 독려한다. 그의 시적 행위는 국가 간 경계를 구축했던 때를 기억하게 하며 역사적 갈등을 되새기게 했다. 이 작업은 분쟁지역의 갈등 상황이 갖는 부조리를 드러낸 작업이다. 그러나 작가가 분쟁 당국이 아닌 벨기에 출신이기에 작업의 정치적 행위는 객관적이면서 보편적으로 보인다. 우리는 중동의 해묵은 분쟁을 과거의 지역적 문제로만 보는 게 아니라 영토 분쟁의 이슈 자체를, 거리를 두고 현재의 관점에서 보게 된다.

알리스의 행위는 은유적이고 시적이지만 동시에 엉뚱하고 어처구니없는 헛수고다. 군대 용어로는 ‘삽질’이다. 그런데 그는 ‘믿음이 산을 움직일 때’(2002년)라는 작업에서 진짜 삽질을 하기도 했다. 이는 페루 리마에서 500명의 자원자들에게 삽을 하나씩 쥐여주고 거대한 모래 산을 한 뼘 정도 옮긴 공동작업이었다. 이 작업으로 참여자들은 실제로 무언가를 함께 변화시킬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됐고 사회적 무력감에서 벗어나는 자극을 받았다. 작가가 가진 사회 변화에 대한 의지 및 부조리에 대한 저항의 의도를 여기서 읽을 수 있다.

우리가 살고 있는 생산 지향, 소비 지향의 사회와는 반대로 가는 작가. 알리스는 1990년대 초부터 물질 중심적 가치관에서 보기엔 비효율적이라 치부되는 일을 벌여 왔다. 그리고 동시에 그의 작업은 시적 행위가 정치적일 수 있다는 것을 행동으로 보여준다. 아무것도 하지 않는 듯하나, 많은 것을 하는 작가다.

전영백 홍익대 예술학과(미술사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