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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이란 그녀에 8만명 111억 낚였다

입력 | 2015-05-20 03:00:00

“반갑다 친구야, 나 기억해?” 중년男 상대 사기전화 일당 52명 적발




“철수지? 정말 오랜만이다. 기억할지 모르겠는데 나 영희(가명)야.”

강원 홍천군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김철수(가명·52·자영업자) 씨는 올해 3월 ‘6학년 때 짝꿍’이라는 한 여성의 전화를 받았다. 김 씨는 속으로 ‘영희?’라며 고개를 갸우뚱했다. 40년 전 일이라 기억이 가물거렸다. 그러나 마치 어제 본 듯한 상대방의 친근한 말투에 어찌하다 반갑게 인사하고 안부를 물었다.

이 여성은 “남편과 이혼한 뒤 딸 하나가 있다”는 등 묻지도 않은 가족 얘기를 털어놨다. 이어 “한 시사주간지에 입사해 구독확장 100부를 할당받았는데 한 부만 구독해 달라”고 요청했다. 순간 김 씨가 머뭇거리자 여성은 “구독해주면 다음 주에 만나 소주 한잔 사겠다”고 제의했다. ‘만나자는 말’에 솔깃해진 김 씨는 2년 치를 구독 신청했고, 한발 더 나아가 이 여성이 “내가 블랙박스 판매도 하고 있다”고 말하자 그것도 주문했다. 김 씨는 여성이 불러준 계좌로 70여만 원을 이체한 뒤 연락을 기다렸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뒤늦게 초등학교 친구들을 수소문한 결과 자신이 사기를 당한 사실을 알았다.

경기 성남시 분당경찰서는 이런 수법을 통해 100억 원대의 부당이득을 취한 혐의(사기)로 콜센터업체 대표 김모 씨(50) 등 3명을 구속하고 연모 씨(52·여) 등 직원 49명을 불구속 입건했다고 19일 밝혔다. 이들은 2007년 12월부터 지난달 중순까지 경기 부천시 원미구에 사무실을 차려놓고 전국의 남성 8만5300여 명을 상대로 동창생과 후배 등을 사칭해 주간지와 블랙박스를 팔아 111억 원을 챙긴 혐의다. 이들은 연간 구독료가 13만8000원인 주간지를 19만8000원을 받고 판매가가 8만9000원인 블랙박스를 39만6000원에 팔았다.

조사 결과 이들의 ‘영업 타깃’은 주로 50대 남성이었다. 도시지역보다는 대부분 강원 충청 영호남의 시골 면단위 초등학교 졸업생이 대상이었다. 동창이라며 전화를 건 텔레마케터도 대부분 50대 여성들이었다. 이들은 연락처를 확보하기 위해 인터넷 동문 카페 관리자나 학교 행정실에 “졸업생인데 동창생 명부를 사고 싶다”고 접근해 10만 원 안팎에 구입했다. 이들이 확보한 졸업생 명부는 700여 개 학교에 이르는 것으로 확인됐다.

텔레마케터 책상에는 구매를 권유하는 모범통화 내용까지 붙어있었다. 여성들은 “친구야 반갑다. 우리 아이가 (주간지, 블랙박스 회사에) 임시직으로 취직했는데 판매 실적이 있어야 정규직이 될 수 있다. 한 번만 도와달라”며 주간지 연간구독, 블랙박스 구매를 권유했다. 1건의 계약이 성공하면 5만5000원의 수당을 받았다. 또 피해자의 인적사항을 관리하면서 주간지 구독이 끝날 때 다시 전화를 걸어 연장을 독려하기도 했다.

경찰은 “피해자들은 수십 년 전에 연락이 끊겼던 초·중학교 여자 동창생이 갑자기 전화를 걸어 반갑게 대하며 딱한 사정을 얘기하면 비교적 적은 금액이라 쉽게 속아 넘어갔다”고 말했다.

성남=남경현 기자 bibulu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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