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계기로 육식과 멀어진 사람에게 한국의 현실은 잔인하다. 어지간한 메뉴에는 다 어떤 형태로든 고기가 들어있기 때문에 피하기가 쉽지 않다. 나야 어패류는 먹으니 덜하지만 엄격한 채식을 하는 사람은 못 먹어 골병들기 딱 좋다. 실제로 엄격한 채식주의자(비건)가 흔한 외국인 중에서는 관광이나 사업차 한국에 왔다가 낭패를 겪는 사례도 꽤 된다. 언젠가 제주도의 공항에서 배를 곯은 외국인 관광객이 편의점에서 김밥을 사려다 햄이 든 것을 보고 그마저 포기하고 돌아서는 모습을 본 적도 있다.
이런 생각이 뜬금없이 든 이유는 최근 영화제에서 본 영화 한 편 때문이다. ‘잡식 가족의 딜레마’라는 다큐멘터리 영화다. 갑자기 육식을 끊기로 결심한 엄마(감독 자신)와 아직은 고기가 좋은 나머지 가족이 벌이는 소동을 잔잔히 기록했다.
대강 이해가 가는 상황이다. 한국에서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 주변에서는 어떻든 갈등이 일어난다. 대개 두 가지 중 하나다. 고기를 먹지 않는 사람에게 고기를 권하면서 벌어지는 어색한 갈등과 반대로 고기를 먹겠다는 사람에게 먹지 말라고 권하면서 벌어지는 분위기 싸해지는 갈등. 남에게 뭘 권하지 못하는 나는 주로 전자를 겪는데 심지 굳은 감독은 후자의 상황을 선택한 듯했다. 평화주의자인 나는 ‘그냥 각각 먹고 싶은 거 먹고 살면 안 돼? ‘잡식 가족’이 되면 되잖아!’를 속으로 외쳤지만 그게 현실에서 좀체 쉽지 않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식탁 위 ‘먹고사니즘’은 생각보다 미묘한 문제다.
다행히 영화 속 갈등은 감독과 아들이 촬영차 돼지 사육농가 한 곳을 방문하기 시작하며 서서히 누그러졌다. 돼지를 좁고 어두운 곳에서 집단으로 키우는 공장식 사육 대신에 환하고 넓은 우리에 놓아 키우는 농가였다. 갇혀 지내는 팔자는 매한가지였지만 그래도 돼지의 삶의 질이 달랐다. 감독과 아들은 돼지에게 먹이도 주고 더운 날 물도 뿌려주며 접촉을 늘려갔다. 돼지가 그저 ‘고기’의 공급원이 아니라는 것을 느끼게 되자 아들도 점차 엄마의 마음을 이해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런 교감도 도축장으로 가야만 하는 돼지의 운명은 바꾸지 못했다. 그건 거대하고 견고한, 산업이었다.
윤신영 과학동아 편집장 ashilla@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