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6번째로 무동력 세계항해 성공한 김승진 선장
210일간의 세계일주 항해를 마치고 16일 오후 3시에 충남 당진시 왜목항으로 돌아온 김승진 선장이 요트 ‘아라파니’호 앞에서 미소 짓고 있다. 당진=김준일 기자 jikim@donga.com
세계 일주를 시작한 지 174일째인 4월 11일 인도네시아 수마트라 섬과 자바 섬 사이 해역에 들어섰을 때였다. 바람이 거의 불지 않는 적도 부근으로 해적들이 수시로 출몰하는 곳이기도 했다.
깜빡 잠이 들었을까, 알람이 요란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3마일(약 4.8km) 이내에 물체가 다가오고 있다는 레이더 경고였다. 잠에서 깬 김 선장은 황급히 갑판 위로 올라갔다. 눈에 보이는 건 없었다. 하지만 레이더 속 물체는 빠르게 다가왔다. 불안했다. 일반적으로 해적들은 어둠 속에서 몰래 다가와 서치라이트를 켜고 약탈할 배를 확인한다. 이어 갈고리를 던져 배 위에 올라타 장비와 식료품을 약탈하고 선원들을 납치하기도 한다. 김 선장은 만약의 사태를 대비해 요트의 모든 불을 껐다. 갑자기 3척의 배에서 서치라이트가 켜졌다. 여러 개의 빛줄기가 바다 위를 샅샅이 훑기 시작했다. 숨을 죽인 김 선장은 돛을 이리저리 돌리며 그들의 눈을 피했다. 1시간쯤 지났을까 다행히 해적선들은 멀어져 갔다. 그제야 안도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항구에 발을 디딘 김 선장은 왈칵 눈물을 쏟았다. ‘떡 진’ 채 귀를 덮은 머리와 까맣게 그을린 피부에서 그간의 고생을 짐작할 수 있었다. 마중 나와 있던 가족, 당진시개발위원회, 유기준 해양수산부 장관, 안희정 충남도지사, 시민 등이 박수를 치며 환호했다. 배가 항구에 닿기 전부터 하염없이 눈물을 흘리던 딸 가은 양(18)은 아버지 품에 달려가 안겼다. “아빠 너무 말랐다….”
김 선장은 길이 13.1m, 높이 17m인 요트 아라파니호로 태평양∼남극해∼대서양∼인도양을 모두 거쳐 약 4만1900km의 항해를 마쳤다. 그가 도전한 여정은 바람에만 의지해 혼자 요트를 조종하되 항구나 육지에 기항하지 않는 항해다. 응급상황이 발생해도 외부 지원을 받아선 안 되며 항해 기간 내내 지구를 동서 중 한쪽 방향으로만 돌아야 한다. 1969년 영국의 로빈 녹스존스턴이 처음 도전해 성공한 이후 지금까지 호리에 겐이치(일본·1974년), 제시카 왓슨(호주·2010년), 궈촨(중국·2013년), 아브힐라시 토미(인도·2013년) 등 5명만 성공했다.
김 선장은 지난해 세월호 참사 등을 겪으면서 실의에 빠진 국민에게 희망을 주고 싶어 항해를 시작했다. 그래서 이름도 ‘희망 항해’라 붙이고 아라파니호의 우현에 ‘Sailing with Hope(희망 항해)’라는 글귀를 붙였다. 김 선장은 “나의 도전을 보면서 힘든 삶 속에서 희망의 끈을 놓지 말라는 메시지를 많은 이들에게 주고 싶었다”고 말했다.
항해가 시작된 뒤 첫 번째 위기가 찾아온 건 출발 후 보름 만이었다. 돛의 넓이를 조절해주는 장치가 부러졌다. 바람의 세기에 따라 돛을 조절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이어 냉장고가 고장 났고, 가스레인지는 양쪽 지지대가 떨어졌다. 풍력발전기는 기어가 마모돼 돌지 않았다. 그때마다 직접 고장 난 부분을 수리해야 했다.
900L의 물과 7개월 치 건조식품을 싣고 떠났지만 막바지에는 식량이 모자랄까 봐 만새기 등 바닷물고기를 낚시해 먹었다. 생수가 아까워 샤워는 바닷물로 했다. 김 선장은 조만간 요트레이싱 팀을 꾸려 세계적인 대회에 도전할 계획이다. 그는 “나 스스로와 국민에게 희망을 주는 도전은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며 활짝 웃었다.
당진=김준일 기자 jikim@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