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G 류택현 코치. 스포츠동아DB
“참, 이게 뭔가 싶더라고.”
LG 류택현(44) 코치는 15년 전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난다. 2000년 6월 14일 잠실 삼성전. 공 1개로 승리투수가 된 ‘운수 좋은 날’이었다.
3-3 동점으로 진행되던 연장 12회초 2사 1·3루 위기. 차명석이 9회부터 무실점으로 역투하다 코너에 몰렸다. 타석에는 전년도 54홈런을 때려낸 최고 홈런타자 이승엽. 좌투수인 류택현이 구원등판했다. 포수 조인성과 함께 선택한 초구는 직구. 그러나 손에서 떠나는 순간 싸늘한 ‘느낌’이 왔다. 실투. 아니나 다를까. 이승엽의 방망이는 맹수의 발톱처럼 날카롭게 돌았다. 타구는 총알처럼 눈앞을 지나갔다. “고개를 돌려 방향을 확인할 시간조차 없을 만큼” 음속으로 사라졌다.
류택현이 웃었던 이유는 1승에 허기졌던 과거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그는 1994년 1차지명으로 OB에 입단했지만, 1승도 못하고 1999년 LG로 트레이드됐다. ‘신기루’ 같았던 첫 승의 기회는 LG로 이적한 뒤 우연히 찾아왔다. 1999년 8월 9일 잠실 현대전. 3-3 동점이던 5회초 구원등판해 1.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고, 팀 타선이 5회말 2점을 뽑아주면서 그는 프로 데뷔 6년 만에 처음 승리투수의 월계관을 썼다. 그렇게 잡으려고 용을 써도 다가오지 않던 승리. 그런데 막상 그렇게 승리하니 ‘이게 뭔가’ 싶더란다. 그리고 이듬해 공 1개로 승리하니 ‘이건 또 뭔가’ 싶더란다.
기가 막힌 건, 그뿐 아니었다. ‘1구 승리’ 바로 20일 전인 2000년 5월 25일 광주 해태전. 그날은 공 1개로 패전투수가 된 ‘운수 나쁜 날’이었다. 2-2 동점이던 9회말. 선발투수 데니 해리거를 구원등판한 그는 선두타자 양현석에게 초구를 던지다 중전안타를 맞았다. 그리고 이어 나온 차명석이 1사 만루로 몰린 뒤 박계원에게 끝내기 좌전안타를 허용했다. LG의 2-3 패배. 기록지에는 공 1개만 던진 류택현에게 패전(Losses)을 의미하는 ‘L’이 새겨졌다.
올 시즌에도 1구 승리투수와 1구 패전투수가 나왔다. 4월 10일 LG 김선규는 잠실 두산전에서 공 1개로 승리투수가 됐고, 한화 송은범은 사직 롯데전에서 공 1개로 패전투수가 됐다. 같은 날 1구 승리투수와 1구 패전투수가 동시에 배출된 건 프로야구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다.
지금까지 ‘1구 승리투수’는 모두 15명(15차례), ‘1구 패전투수’는 12명(14차례). 그 중 ‘1구 승리’와 ‘1구 패전’을 동시에 경험한 투수는 그가 유일하다. 1982년 프로야구 출범 후 올해까지 34년간 1군 마운드에서 공 1개라도 던져본 투수는 총 1092명. 0.1%도 안 되는 확률의 범주에 든 유일한 주인공이니, 진기록이라면 진기록이다. 류택현은 훗날 2007년 5월 1일 잠실 현대전에서도 ‘1구 패전투수’가 됐다. 2차례나 ‘1구 패전’을 경험한 것은 롯데 강영식(2008년 5월 7일 사직 한화전, 2010년 9월 7일 사직 넥센전)과 그 2명뿐이다.
“공 1개의 가격은 8000원도 되지 않지만, 공 1개의 가치는 돈으로 환산할 수 없죠. 이 공 하나 때문에 누군가는 10억 원짜리 선수가 되고, 누군가는 100억 원짜리 선수가 될 수도 있으니까요. 공 하나에 수많은 사람들이 울고 웃잖아요. 지금까지 잠실 마운드에서 공 1개 던져보지 못하고 유니폼을 벗은 선수가 얼마나 많아요. 공 1개에 승리도 해보고, 공 1개에 패전도 해보니, 승리투수는 하늘의 뜻이더라는 걸 그제야 알겠더군요. 승리에만 너무 매달리면 정작 마운드에서 던지는 투수 본연의 행복을 잃어버릴 때가 있어요. 1구 1구 혼신의 힘을 다해 공을 던질 때, 그 자체가 투수에겐 행복입니다. 지금도 누군가는 잠실 마운드에서 공 1개 던져보는 게 평생의 꿈이고 소원일 테니까요.”
류 코치는 이 말을 종종 LG 투수들에게 전한다고 한다. 그리고…. LG 시절 아꼈던 후배 심수창(롯데)에게도 전하고 싶어 했다. 심수창이 과거 힘들었던 시절에 “다시 마운드에 설 수만 있다면, 심장이 터지더라도 야구장을 전력으로 100바퀴 돌고 싶다”고 했던 그 말을 류 코치는 잊지 않고 있다. 2011년 8월 27일 이후 1343일 동안 승리와 인연을 맺지 못하는 심수창. 공 1개마다 그 간절한 그 마음을 담아 던져보라는 조언이자 응원이다.
이재국 기자 keyston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