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여자들의 이상형은 근육보다 사상이 울퉁불퉁한 ‘뇌섹남’이다. 뇌섹남은 ‘뇌가 섹시한 남자’라는 뜻의 신조어. 2013년 영국 잡지 ‘엠파이어’에서 ‘세계에서 가장 섹시한 남녀 배우’ 50인을 각각 선정했는데, 남자 배우 1위는 BBC 인기 드라마 ‘셜록’의 주연 베니딕트 컴버배치였다. 그가 쟁쟁한 미남 배우들을 물리치고 1위를 차지한 이유를 잡지에서는 ‘영리함’으로 파악했다. 국내에서도 이처럼 ‘뇌가 섹시한 남자’가 대세로 떠오르고 있다.
국내 방송이나 온라인에서 대표적인 뇌섹남으로 언급되는 이들은 케이블채널 tvN 서바이벌게임 프로그램 ‘지니어스’ 시리즈에서 우승을 차지한 전 프로게이머 홍진호, 개그맨 장동민 외 칼럼니스트 허지웅과 김태훈, 평론가 진중권, 가수 유희열과 성시경 등이다. 이름이 알려진 유명인이라는 것 외에는 닮은 점이 전혀 없는 이들은 ‘뇌가 섹시하다’는 수식과 함께 대중의 입에 오르내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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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근육에는 일정한 기준이 있을 지언정 엑스레이를 찍거나 두개골을 쪼개 볼 수도 없는 상황에서 아름다운 뇌의 기준은 뭐란 말인가. 작정하고 노력해 신체적 섹시함을 만들어 ‘섹시남’이 될 수는 있겠지만, 뇌섹남은 말 그대로 ‘뇌’의 섹시함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어떻게?
뇌섹남은 단순히 공부 잘하는 반듯한 ‘모범생’도 아니고, 스펙 넘치는 ‘엄친아’(엄마 친구의 아들)와도 결이 다르다. 말발이 세다고 뇌섹남이 될 수도 없다. ‘뇌가 섹시한 남자’라는 말을 대중화했다고 주장하는 팝 아티스트 낸시랭은 과거 인터뷰와 방송에서 “뇌가 섹시한 남자가 좋다. 뇌가 섹시한 사람은 센스, 위트, 인류애가 있는 남자”라며 현대 여성이 뇌가 섹시한 남자를 좋아하는 이유로 “스마트할 뿐 아니라 내면적으로 퓨어해 사랑하는 사람에게 최선을 다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인상적인 언변이나 활약 덕에 ‘뇌섹남’으로 통하는 유희열, 김태훈, 장동민(왼쪽부터).
뇌섹남보다 먼저 유행한 말이 있다. 뭐든 나보다 잘한다는 ‘엄친아’다. 뇌섹남도 큰 틀에서는 엄친아와 다르지 않지만, 좋은 학교를 나와 좋은 직장에 들어가 승승장구 하는 보편적 고(高)스펙자가 엄친아라면 뇌섹남은 거기에 자신만의 색을 입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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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뇌섹남은 일종의 재미있는 남자입니다. 엄친아 요소도 있지만, 엄친아는 같이 있을 때 나를 주눅 들게 하고 위축감이 들게 하는 캐릭터라면, 뇌섹남은 남을 더 배려하고 친근하며 예능감이 있죠. 평소에는 재미있다가 결정적일 때 지적 매력을 발산하는 것도 특징입니다. 객관적인 스펙이 좋은 방송인 전현무 씨도 마냥 ‘엄친아’ 이미지만 밀었다면 지금처럼 인기가 없었을 겁니다.”
‘뇌섹남’ 트렌드를 반영한 케이블채널 tvN 신규 예능프로그램 ‘뇌섹시대-문제적 남자’.
tvN ‘더 지니어스 : 게임의 법칙’에서 비상한 두뇌 플레이를 보여준 전 프로게이머 홍진호.
“여자가 뇌가 섹시한 남자를 찾듯, 남자도 뇌가 섹시한 여자를 찾습니다. 남녀 모두 서로를 잘 배려하고, 소통이 잘 되며, 즐겁게 어울릴 수 있는지를 중요하게 여기고, 정서적·감정적으로 교감할 수 있는 상대를 찾는 거죠. 중요한 건 사회적 스펙의 중요성을 버린 게 아니라, 기본적인 스펙에 추가로 생각까지 멋지고 현명한 사람을 요구한다는 점입니다. 여성은 고학력화와 사회 진출 확대로 남성에게 의존하기보다 주체적인 존재이길 원하고, 자기보다 잘난 남자가 아닌 평등한 인격체이자 대화가 잘 통하는 남자를 원합니다. 그런 여자에게 뇌섹남은 원하는 조건을 갖춘 남자인 셈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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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스섹슈얼의 대명사 이준기, 까칠한 도시 남자 열풍의 주인공 현빈, 최근 만능 주부 이미지로 인기를 끄는 차승원(왼쪽부터).
꽃미남에서 훈남, 짐승남, 차도남 넘어 뇌섹남까지
멋진 남자는 언제나 사랑받았지만, 그 기준은 시대마다 조금씩 달랐다. 1980년대에는 남성용 스킨향을 진하게 풍길 법한 터프가이가 인기였다면, 90년대에는 여자보다 선이 더 고운 꽃미남이 득세했다. 드라마 속 실장님, 본부장님의 인기와 함께 찾아온 ‘차도남’(차가운 도시 남자)에 이어 최근 예능프로그램에서 사랑받는 ‘뇌섹남’(뇌가 섹시한 남자)까지…. 2005년부터 10년 동안의 관련 기사를 분석해 여성 이상형의 변화 추이를 살펴봤다. 물론 지금 인기 있어도 그게 얼마나 갈지는 모른다. 여자 마음은 갈대라고 하니까.
2005년에는 패션과 외모에 관심이 많은 꽃미남인 메트로섹슈얼(metrosexual)의 재해석이 이뤄졌다. 잘 빠진 몸매와 멋진 얼굴은 공통적이지만 좀 더 남성성이 가미된 위버섹슈얼(ubersexual)이 인기를 끌었다. 권위적인 마초와는 달리 강인하고 자신감이 있지만 스타일과 매너가 살아 있는 남자다. 한 결혼정보회사에서 진행한 설문조사에서는 드라마 ‘프라하의 연인’에 출연한 배우 김주혁이 위버섹슈얼 1위를 차지했다.
2006년에는 왕자님처럼 먼 곳의 그대보다 자상한 나만의 피앙세를 찾는 경향이 도드라지면서 ‘훈남’이 인기를 끌었다. 권상우는 거친 남자를 연기한 ‘야수’보다 자상한 역으로 나온 ‘청춘만화’에서 더 큰 인기를 끌었고, 배우 이태곤과 정준도 드라마에서 자상한 이미지로 사랑받았다. 여기에 1000만 관객을 넘긴 ‘왕의 남자’ 신드롬으로 이준기처럼 여성스러움을 추구하는 크로스섹슈얼(crosssexual) 트렌드가 패션계를 강타했다.
2008년에는 뻔뻔하고 재수 없지만 솔직해서 정복욕, 승부욕을 자극하는 옴파탈이 대세였다. 아이돌그룹 빅뱅 태양이 ‘내가 바람피워도 너는 절대 피우지 마’라고 한 노래 ‘나만 바라봐’가 히트했고, 드라마 ‘베토벤 바이러스’의 강마에(김명민 분)같이 까칠하고 괴팍한 완벽주의자 캐릭터가 안방극장에서 인기를 얻었다.
2009년은 거친 카리스마의 ‘짐승남’과 섬세한 감성의 ‘토이남’이 공존하는 시기였다. 짐승남은 과거 터프가이와 일맥상통하는 캐릭터다. 아이돌그룹 2PM이 근육질 몸매에 현란한 춤사위로 누나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드라마 ‘선덕여왕’의 비담(김남길 분)이 길들일 수 없는 짐승 같은 매력으로 시청자를 사로잡았다. 그룹 ‘토이’의 노래 주인공처럼 감수성이 예민하고 섬세하면서도 자기애 강한 ‘토이남’도 또 다른 인기의 한 축을 담당했다.
2010년에는 “나는 차가운 도시 남자. 하지만 내 여자에겐 따뜻하지”라는 대사가 어울리는 ‘차도남’이 인기였다. 일에서는 완벽하지만 내 여자에겐 따뜻한, 여성들이 바라는 멋진 모습을 다 갖춘 남자다. 과거 인기있던 ‘나쁜 남자’보다 사람에 대한 정이 있는 게 달라진 점이다. 드라마 ‘시크릿가든’의 현빈이 차도남을 넘어 까칠한 도시 남자(까도남)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했다.
2011년은 ‘까도남’이 가고 ‘스도남’(스위트하고 스마트한 도시 남자)이 다시 인기를 끌었다. 주머니에 넣고 다니고 싶은 소중한 남자라는 뜻의 ‘포켓남’도 인기였다. 가수 겸 배우 이승기가 이 시기 ‘스도남’ ‘포켓남’의 대명사였다.
2013~2014년에는 드라마 ‘너의 목소리가 들려’의 이보영-이종석, ‘별에서 온 그대’의 전지현-김수현 등 연상녀-연하남 커플이 줄을 이었고, 예능프로그램 ‘일밤-진짜 사나이’의 박형식이 ‘아기 병사’로 떠오르는 등 동안이면서 남자다움에 애교까지 갖춘 ‘연하남’이 인기를 끌었다.
지난해부터 올해까지 이어진 굳건한 이상형은 자기 일에 가사노동까지 잘하는 슈퍼맨이다. ‘일밤-아빠! 어디가?’ ‘해피선데이-슈퍼맨이 돌아왔다’ 같은 아빠 예능프로그램과 요리프로그램의 인기로 가수 윤민수, 배우 송일국, 이서진, 차승원 같은 인물들이 인기를 끌었다. 공통점은 본업에서도 성과를 내면서 요리 혹은 육아‘까지’ 잘한다는 점이다. 일본에서도 비슷한 시기 ‘이케멘(イケメン·꽃미남)’이 아닌 ‘이쿠멘(イクメン·육아남)’이 인기를 끌고 있다.
구희언 기자 hawkeye@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