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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돈 값에 한숨 쉬는 서민들… 관광객 넘쳐나는 긴자거리

입력 | 2015-02-24 03:00:00

엔 약세 2년… 日경제 양극화 현장




2012년 12월 집권한 아베 신조(安倍晋三) 일본 총리가 ‘엔화 약세’를 유도한 지 2년이 지났다. 그동안 일본 사회는 어떻게 변했을까. 한마디로 양극화가 더 심화됐다. 서민과 중소기업들은 못살겠다고 아우성을 치고 대기업과 여행업계는 쾌재를 부르고 있다. ‘엔화 약세 2년’ 일본을 강타한 양극화의 현장을 가 보았다.

○ “살기 너무 힘들다”

지난달 4일 도쿄(東京) 미나토(港) 구 시바우라(芝浦)의 한 잡화점. 립스틱 등 인기 상품 옆에 적힌 형광색 종이 가격표는 작년 4월 소비세(부가가치세)가 5%에서 8%로 올랐을 때 한 번 고쳐진 데 이어 최근에 또다시 가격을 고쳐 올렸다. 수입품 가격이 지속적으로 올랐기 때문이다. 점원은 “하루하루 손님이 팍팍 주는 게 느껴진다”고 했다.

일본 서민들이 즐겨 먹는 ‘규돈(쇠고기덮밥)’ 최대 체인인 요시노야(吉野家)는 지난해 12월 300엔(약 2800원)짜리를 380엔으로 26.7%나 올렸다. 주 원료인 미국산 쇠고기 수입 가격이 올라 어쩔 수 없었다는 게 회사 측 설명이다. 그뿐만 아니다. 파스타, 식용유, 냉동식품, 카레 가루, 아이스크림, 위스키 등 원료의 해외 수입 비중이 높은 식음료와 생필품 가격들도 이미 줄줄이 올랐다. 30대 비정규직 직장인 가토 이치로(加藤一郞) 씨는 “물가가 너무 올라 외식을 줄이고 있다”고 했다.

서민의 힘든 생활은 후생노동성의 각종 통계로도 확인된다. 생활 의식 조사 최신판(2013년)에 따르면 ‘현재 상황이 매우 힘들다’ 또는 ‘어느 정도 힘들다’라는 응답이 59.9%로 조사를 시작한 이후 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지난달 4일 발표된 근로자 통계조사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 근로자의 월평균 임금은 31만6694엔으로 물가상승률을 반영할 경우 전년보다 2.5% 줄었다. 리먼 쇼크 영향을 받은 2009년에 이어 두 번째로 큰 감소 폭이다.

니혼게이자이신문이 20∼22일 실시한 아베노믹스 평가에 따르면 무려 81%의 응답자가 “경기회복을 실감하지 못한다”고 했다.

○ 부도 공포 중소기업

오사카 부 모리구치 시에 있던 중소기업 메이세이 금속공업소는 엔화 약세 여파로 2013년 파산했다. 본사 주소지를 찾아본 결과 기업 건물이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모리구치=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중소기업들의 부도 도미노도 이어지고 있다. 오사카(大阪) 부 모리구치(守口) 시에 자리 잡은 메이세이(明星) 금속공업소는 대기업 파나소닉 거래처로 이뤄진 ‘협영회(協榮會)’ 회장을 배출할 정도로 탄탄했지만 2013년 9월 파산했다. 지난달 28일 기자가 방문했을 때 공업소 건물은 이미 사라지고 없었다. 인근 자동차 부품 회사 관계자는 “모리구치 시내 상당수 중소기업이 파나소닉 하청 물량으로 먹고살았는데 요즘은 하루가 멀다 하고 문을 닫는 기업이 속출하고 있다”고 말했다.

지난달 27일 방문한 기후(岐阜) 현 가이즈(海津) 시에서 정밀 부품을 생산하는 중소기업도 마찬가지였다. 사장은 “철, 구리 등 재료를 대부분 수입하는데 비용이 늘고 있다. 대기업은 납품 단가를 올려 주지 않는다. 매우 힘든 상태”라고 하소연했다. 1959년에 창립되어 연간 매출이 13억 엔, 종업원은 110명가량이지만 사장은 “이대로 가면 종업원 해고가 불가피하다”고 말했다.

일본 신용조사회사인 데이코쿠(帝國)데이터뱅크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엔화 약세 영향으로 도산한 기업(부채 1000만 엔 이상)은 2013년(130개)의 2.7배인 345개사나 됐다. 한 중소업체 사장은 “집계에 잡히지 않는 소규모 기업까지 합치면 도산 기업은 몇 배로 늘 것”이라고 했다. 일본금형공업회 우에다 가쓰히로(上田勝弘) 회장도 “20여 년 전 금형 중소기업은 약 1만2000개였는데 지금은 절반 정도가 폐업했다”고 전했다.

○ 여행업계와 대기업은 환호

1일 일본 도쿄 긴자에 있는 면세점 ‘라옥스’에는 중국인, 대만인 관광객이 줄지어 드나들었다. 이들은 1개에 30만 원 이상 하는 고가품을 서너 개씩 샀다. 도쿄=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

요즘 도쿄 시내 명품과 쇼핑의 거리인 긴자(銀座)는 대만, 한국, 중국 등 외국 관광객들로 넘쳐 난다. 시계와 보석 등을 파는 면세점 라옥스(LAOX) 옆에는 별도의 환전소까지 마련되어 있다. 일본정부관광국(JNTO)에 따르면 지난해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은 1341만4000명으로 사상 최고 기록을 경신했다. 이들이 일본에서 쓴 돈도 2013년보다 43.3%나 늘어난 2조305억 엔으로 역시 사상 최대다.

수출을 주로 하는 대기업도 엔화 약세의 과실을 톡톡히 따먹고 있다. 후지쓰(富士通)는 지난해(2014년 4월∼2015년 3월) 순이익 전망치를 70억 엔 올린 1320억 엔으로 최근 발표했다. 2013년에 비해 17% 늘었다. 철강 대기업인 JFE홀딩스도 100억 엔 올려 1300억 엔으로 전망했다. 달러로 벌어들인 돈을 엔화로 환산하면서 차익이 생긴 것이다.

SMBC닛코(日興)증권이 1월 말까지 발표한 161개 상장사의 업적을 집계한 결과 지난해 영업이익 전망은 2013년에 비해 9.4% 증가한 4조8730억 엔, 순이익은 18.2% 늘어난 3조360억 엔이다. 이토 게이이치(伊藤桂一) 수석연구원은 “전체적으로 엔화 약세의 효과가 컸다”고 말했다.

구마노 히데오(熊野英生) 일본 다이이치세이메이(第一生命)경제연구소 수석 이코노미스트는 “올해도 엔화 약세는 지속될 것”이라며 “연말이면 달러당 125엔(23일 현재 118엔) 내외가 될 것으로 예상한다”고 밝혔다.

도쿄·가이즈·모리구치=박형준 특파원 lovesong@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