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가장 아름다울 때 내 곁엔 사랑하는 이가 없었다/김경주 지음/159쪽·9500원·열림원 ‘내가 가장 아름다울 때… ’를 쓴 김경주 시인
사내가 절반쯤 건넜을 때 신호등이 빨간불로 바뀌었다. 사람들은 사내의 손을 밟고 서둘러 건넜다. 홀로 남은 사내는 움직이는 차를 피해 중앙선 위에 몸을 엎드렸다. 순간 하늘에서 눈이 내렸고 사내는 멍하니 그 눈을 보았다. 고무 튜브 아래로 검은 물이 흘렀다. 겁을 먹은 탓일까. 소변이었다.
김 시인은 11년 전 목격한 사내의 이야기를 시극(詩劇) ‘내가 가장 아름다울 때 내 곁엔 사랑하는 이가 없었다’로 풀어냈다. 제목은 왕자웨이 감독의 영화 ‘동사서독’ 중 배우 장만위의 마지막 대사에서 따왔다. 왕 감독의 이별, 어긋남의 정서가 시인의 시극에도 담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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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누가 사내를 인도로 데려다 줄까 궁금했어요. 사회의 어두운 면에만 주목했다면 앵벌이 조직이 떠올랐겠지만 전 ‘아내’를 떠올렸습니다. 사내에게 아내가 있어 그 아내가 업어주었다면…. 그런데 그런 아내를 업어주지 못하는 사내 마음은 어떨까. ‘업힌다’는 행위가 갖고 있는 곰살맞고 살가운 느낌을 풀어내고 싶었습니다.”
시극의 공간은 겨울이 돼 문을 닫은 해수욕장의 작은 파출소다. 검은 지느러미 같은 고무튜브를 단 ‘김 씨’가 죽기 위해 눈이 쏟아지는 바다로 기어가고 있다. 김 씨를 목격한 파출소 직원이 김 씨를 업고 파출소로 온다. 경찰은 김 씨를 살리려 애쓰고 김 씨는 죽으려 애쓴다. 시적인 대화가 오가며 서로의 상처가 보듬어진다. 경찰에겐 자폐아인 아들을 잃은 슬픔, 김 씨에겐 아내에게 버림받은 아픔이 있었다. “사랑이 뭐라고 생각해?”(파출소 직원) “어둠 속에서 손을 꼭 잡고 이렇게 조금만 있자… 하는 거요.”(김 씨)
극은 환상적인 결말로 맺어진다. 파출소 직원의 숨진 아들과 김 씨의 가출한 아내가 파출소에 찾아온다. 이런 ‘마술적 사실주의’의 형식을 택한 데 대해 김 시인은 “리얼리티로 풀어내면 소외된 자에 대한 동정으로 읽히기 쉬울 것 같았다”고 밝혔다. 낮은 자에 대한 측은한 마음이 아닌, 같은 눈높이에서 서로의 마음을 공감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는 것이다.
이 시극은 오세혁 씨가 연출을 맡아 5월 무대에 오른다. 공연 제목은 그가 초고 제목으로 정했던, 대사 속에 여러 번 등장하는 ‘그런 말 말어’다. 시인은 “상대를 무장해제시키는 말이다. ‘알고 있는 게 다가 아니야, 희망이 남아 있어’를 일러주는 말”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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