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연수 논설위원
역사를 보면 석유를 둘러싼 경제 전쟁의 뒷면에는 늘 국제 정치와 강대국들의 세력 다툼이 있었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된 데는 1980년대 유가 폭락이 큰 역할을 했다. 최근 유가 급락을 놓고도 러시아 경제를 무너뜨리기 위한 미국과 석유수출국기구(OPEC)의 합작이라는 ‘음모론’이 퍼지고 있다.
실제로 가장 타격을 입은 곳은 러시아 베네수엘라 이란 등 미국과 대립하는 나라들이다. 반미(反美) 노선의 에보 모랄레스 볼리비아 대통령은 최근 러시아투데이와의 인터뷰에서 “유가 폭락은 미국이 일으켰으며 러시아와 베네수엘라의 경제를 약화시키려는 목적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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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이 음모를 꾸몄는지는 알 수 없지만 유가 하락을 방관하며 즐기는 건 맞는 듯하다. 지난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크림 반도 합병에 격분한 미국은 러시아에 경제 제재를 가하고 우크라이나에 군사 지원을 하고 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사사건건 미국에 태클을 건 눈엣가시 같은 존재다. ‘강한 러시아’를 추진하는 푸틴을 미국 포브스지(誌)는 2년 연속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위로 꼽았다.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은 2위, 중국의 시진핑 국가주석이 3위다.
미국으로선 러시아 경제가 악화돼 푸틴이 흔들리면 좋을 것이다. 게다가 경제의 70%를 소비지출에 의존하는 미국은 저유가가 되면 소비와 투자가 늘어나 경제가 좋아진다. 유가 하락은 미운 나라를 손보고 경제도 활성화하는 일거양득의 카드다.
러시아는 죽을 지경이다. 석유와 천연가스는 러시아 수출의 70%, 정부 재정 수입의 절반을 차지한다. 2000년대 고(高)유가 덕에 연평균 7% 성장률을 보였던 러시아 경제는 유가 추락으로 디폴트 위기가 거론될 만큼 고꾸라졌다.
러시아는 미국에 항복할 것인가. 국내 러시아 전문가들 중엔 “아니다”라는 사람이 많다. 러시아는 역사적 의미가 큰 크림 반도를 포기하지 않을 것이다. 러시아는 세계 9위의 경제대국인 데다 외환보유액도 적지 않다. 대외적 압력이 강할수록 ‘21세기 차르’ 푸틴에 대한 지지가 높아질 것이라는 해석도 나온다. 독재를 감안하더라도 최근 좀 떨어졌다는 푸틴 지지율이 무려 82%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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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가를 둘러싼 강대국들의 합종연횡은 세계 권력 지도를 어떻게 바꿀 것인가. 주변 4강의 움직임에 나라 운명이 달린 한국으로선 주목해야 할 문제다. 당장 통일을 위해 남북한과 중국 러시아 유럽을 경제공동체로 묶자는 박근혜 대통령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부터 미-러 힘겨루기에 끼어 흔들리게 생겼다.
신연수 논설위원 ysshi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