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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파원 칼럼/박형준]‘집단 최면’에 걸린 일본

입력 | 2014-12-29 03:00:00


박형준 도쿄 특파원

도쿄(東京) 도심에서 북서쪽으로 약 20km 떨어진 곳에 ‘기요세(淸瀨) 시’가 있다. 농업이 주된 산업이고 당근과 시금치가 유명하다. 전체 면적의 절반 정도가 녹지인 전형적인 시골 마을이다. 시골이라고 허투루 봐선 안 된다. 시의회가 2008년 6월 ‘종군위안부 문제에 대해 정부의 성실한 대응을 요구하는 의견서’를 가결할 정도로 주민들의 정치적 수준이 높다. 시의회는 “일본 정부가 피해를 입은 여성에게 공식 사죄도 하지 않고 충분한 보상도 하지 않았다”며 정부를 비판했다.

그런 기요세 시의회가 최근 태도를 바꿨다. 이달 18일 위안부 관련 두 번째 의견서를 내고 “위안부 문제에 대해 중요한 정보가 허위로 판명돼 2008년 6월 의견서가 근거를 잃었다”고 주장했다. ‘강제 연행은 확인되지 않았다’고 명시한 고노담화 검증 결과 보고서(올해 6월)와 아사히신문의 요시다 세이지(吉田淸治·제2차 세계대전 때 제주에서 다수의 여성을 강제로 연행해 위안부로 삼았다고 증언) 관련 기사 취소(올해 8월)를 근거로 2008년 의견서를 사실상 취소한 것이다.

조금 과장해 표현하자면 요즘 일본은 ‘집단 최면’에 걸린 것 같다. 아사히신문의 요시다 증언 오보 인정 이후 ‘일본의 위안부 동원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는 분위기가 급속도로 확산되고 있다.

동아일보 도쿄지사에는 수시로 전화가 걸려와 “일본이 위안부를 강제 동원하지 않았는데 왜 일본을 비난하는 기사를 쓰느냐”고 항의한다. 언론사에 전화까지 할 정도로 극성인 일부 이야기가 아니다. 페이스북엔 “한국은 허위 위안부 정보로 일본 때리는 것을 그만두라” “매국 신문 아사히신문을 끊자”는 내용이 넘쳐난다. 심지어 기자와 친분이 깊은 일본 샐러리맨들조차 그 같은 내용에 ‘좋아요’를 달거나 맞장구치는 댓글을 올릴 때에는 아연실색했다.

한 방향으로 가는 일본의 모습에 두려운 생각마저 들어 기자는 일본 지식인들과 만나고자 했다. 최우선적으로 역사학자들을 찾았다. 아베 신조(安倍晋三) 총리와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은 수차례 “위안부 문제는 역사학자들의 연구에 맡겨야 한다”고 언급해왔기 때문이다. 다행히 역사학자들은 일본의 양심이 살아있음을 확인시켜 줬다. 일본 최대의 역사학 단체인 역사학연구회는 10월 15일 ‘정부 수뇌와 일부 매스미디어에 따른 일본군 위안부 문제의 부당한 견해를 비판한다’는 제목의 성명을 내고 아베 총리의 역사 왜곡을 비난했다. 일본 언론들이 위안부 기사에 침묵하고 있을 때여서 성명은 뒤늦게나마 동아일보 보도(10월 31일자 A1·8면)로 세상에 알려지게 됐다.

성명의 울림은 컸다. 역사학연구회 역사과학협의회 일본사연구회 역사교육자협의회 등 일본의 4대 역사학 학술단체는 이달 13일 회의를 열고 아베 총리의 위안부 왜곡에 대해 공동 대응하기로 결의했다. 이들은 ‘위안부 강제동원은 명백하니 아베 총리는 역사적 진실을 인정하라’는 내용을 일본 국내외에 알릴 예정이다.

역사학자들과 만난 이후부터 극우들의 항의전화 받기가 무척 수월해졌다. 예전에는 일본의 위안부 동원 강제성에 대해 설명하느라 진땀을 흘렸는데 최근에는 “일본 역사학자들에게 한번 물어보고 다시 전화주세요”라고 말하면 된다. 기요세 시의회의 한 의원에게도 27일 전화해 “역사학연구회의 성명을 읽어봤느냐”고 물어봤다. 의원은 수화기를 든 채 성명을 확인하더니 “우리도 위안부 존재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좀 더 연구가 필요하다”며 한발 물러섰다. 다음엔 아베 총리에게 그 성명을 읽어봤는지 물어보고 싶다.

박형준 도쿄 특파원 love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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