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중현 경제부장
5일 오후 우리은행 행장후보추천위원회(행추위)가 후보 3명을 면접한 뒤 곧바로 이광구 개인고객본부 부행장을 차기 행장으로 내정하자 탈락한 후보 중 한 명은 이렇게 푸념했다. 서금회(서강대 출신 금융인 모임) 멤버인 이 부행장은 정윤회 문건 파문으로 비선(秘線)실세들의 암투가 사회적 관심사로 떠오른 가운데 터진 ‘정치(政治)금융’ 논란의 주인공이다.
비판여론이 휘몰아치면서 그 며칠 전부터 인선 절차가 중단될 수 있다는 금융권의 전망도 나왔다. 하지만 내정 전날 동아일보 취재진은 이 부행장 내정을 강행하려는 분위기를 감지했다. 정부 고위관계자가 “윗선의 의사가 워낙 굳건해서…. 달라지는 건 없을 것”이라고 말했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이 사람이 돼야 한다’는 부연설명이 없다 보니 밀지를 내린 사람과 천거된 당사자만 그 이유를 안다. 출중한 실력과 경력 때문인지, 권력실세와의 친분 덕인지, 특정 지역 출신이거나 운 좋게 잘나가는 대학에 다닌 덕인지 고위관료들을 포함한 주변 사람들은 모두 추측만 할 뿐이다. 이 과정에서 온갖 설(說)들이 만들어져 시장에 유포된다. 이렇게 자리에 오른 금융권 인사들에겐 퇴임할 때까지 그 꼬리표가 따라다닌다.
‘관(官)은 치(治)하기 위해 존재한다’는 김석동 전 금융위원장의 말로 대변되던 관치는 오래전부터 한국 금융권의 고질병으로 비판받아 왔다. 하지만 관치 인사 때에는 정치권력과 모피아 그룹의 협의 과정이 있었다. 장관들도 상당한 결정권을 행사했다.
관치금융 시절에도 특정 인사 내정설이 수시로 돌았지만 여론의 향배 등에 따라 바뀔 여지가 있었다. 내정자의 문제점이 드러났을 때 정치권이 추천한 인물이라면 관료조직이, 관료가 천거한 경우라면 정치권이 서로 견제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과정이 사라졌다. 윗선이 밀지를 내린 의도를 확인할 채널도 막혀버렸다. 현 정부 들어 청와대에서 일했던 고위 관계자들은 “대통령의 전화를 받은 적은 많아도 대통령에게 전화해본 적은 없다”라고 말한다. 대통령에게 밀지의 진위를 확인하기 쉽지 않은 구조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는 인선 과정에 문제가 생겨도 윗선이 스스로 의사를 거둬들이지 않는 한 밑의 사람들이 인사 방향을 바꿀 수 없다. 또 메시지 전달자가 사심(私心)을 갖고 적당히 자기 생각이나 민원을 끼워 넣어도 누구도 알아챌 수 없다.
박중현 경제부장 sanjuc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