숲
―이제하(1937∼)
밤새 격렬하게 싸우다 달아난 애인을 뒤쫓아 숲까지 갔더니
웬 녀석이 사과궤짝까지 들고 와 새벽부터 웅변연습을 하고 있다.
구케의원이라도 돼 또 나라를 말아먹으려나 싶어 야리다 보니
한 옆에는 낯짝 우두바싸고 세상의 고뇌란 고뇌는 혼자 짊어진 듯이
신음소리를 내는 녀석까지 보인다.
하지만 고요한 바다와 푸른 나무로 에워싸인 숲은
얼마나 아름다운가.
쫓던 애인도 잊고 나는 무슨 생각에 잠긴 말 곁으로 다가간다.
야채와 당근을 먹을 만큼 먹은 듯 말은
호주에 가 있는 짝이라도 생각하는 것 같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그렇게 받아들일 밖에 없다.
시의 배경이 된 공간은 제주도가 아닐까? 여행지에서도 독하게 싸운 그 애인은 어디서 분을 삭이거나 후회하고 있을까. 맨몸으로 뛰쳐나갔을 테니 혼자 공항에 가 있지는 않을 테다. ‘쫓던 애인도 잊고’ 화자는 ‘무슨 생각에 잠긴 말 곁으로 다가간다’. ‘야채와 당근을 먹을 만큼 먹은 듯 말은/호주에 가 있는 짝이라도 생각하는 것 같’단다. 말은 시선을 아득히, 동이 틀락 말락 한 수평선 너머로 두고 있을 테다. 차분해진 화자도 아득히 바다를 바라보며 생각한다. ‘있는 그대로의 세상을 그렇게 받아들일 밖에 없다’고. 참으로 감수성이 안 늙는 시인 이제하!
황인숙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