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훈 사회부장
“그게 뭐… 이집트 대통령이 방문하게 돼서 공항 의전상 시간이 안 맞아서 그렇다 하네요.”(청와대 관계자)
2004년 12월 7일. 당시 유럽 3개국을 순방한 노무현 대통령이 마지막 방문국인 프랑스 파리를 떠나 귀국길에 오르는 날이었다. 갑자기 대통령 특별기의 출발 시간이 늦춰지면서 기자들이 의아해하자 대통령을 수행한 청와대 관계자들은 엉뚱하게 이집트 대통령의 프랑스 방문을 핑계로 댔다. 시간을 때우기 위해 루브르 박물관을 관람한 뒤 특별기가 어둑한 파리 상공을 벗어난 지 25분쯤 지났을 때 노 대통령이 기자들이 앉아 있던 쪽으로 다가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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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 대통령은 해외 순방 때마다 자주 기내에서 기자간담회를 가졌다. 자리가 비좁아 어떤 기자들은 맨바닥에 철퍼덕 앉아서 대통령의 발언 내용을 받아 적었다.
그제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를 마치고 호주에서 귀국하던 박근혜 대통령이 기내에서 기자들과 격의 없이 대화를 나누는 모습을 보면서 노 대통령 재임 시절 청와대 출입기자였던 필자에게는 그때의 비행기 간담회가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박 대통령은 취임 이후 역대 대통령들이 했던 ‘국민과의 대화’ 같은 TV 생중계 토론이나 기자회견을 거의 하지 않았다. 기내 간담회도 이번이 처음이라고 한다. 박 대통령이 국민에게 알리고 싶어 하는 중요한 메시지는 국무회의나 청와대 참모회의에서의 발언 형태로 나왔다.
그래서 언론은 이번 박 대통령의 기내 간담회를 크게 환영하는 분위기다. 박 대통령의 약점으로 지적돼온 ‘소통 부족’이 이제 불식되는 것 아니냐는 평가까지 나온다. 어찌 됐든 이번 순방에서 한중 자유무역협정(FTA) 협상 타결 등 여러 외교적 성과를 거둔 박 대통령으로선 귀국 비행기 안에서 기자들에게 한마디라도 더 설명하고픈 심정이었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박 대통령의 여러 모습 가운데 가장 기억에 남는 순간이 있다. 아마 2001년쯤일 것이다. 재선 국회의원으로 한나라당 부총재였던 박 대통령은 당시 강력한 대권후보였던 이회창 총재의 독주 체제에 맞서 각을 세우는 일이 잦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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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기내 간담회에서는 다른 무엇보다도 세월호 참사 이후 잇따른 총리 후보자 낙마 등 하는 일마다 꼬이면서 무기력증에 빠지는 듯했던 박 대통령이 자신감을 회복한 것처럼 보였다. 정치 입문 시절 지녔던 진정성과 되찾은 자신감으로 경제 살리기, 국가 대혁신 등 굵직한 과제들을 풀어나가길 기대해본다.
김정훈 사회부장 jnghn@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