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치영 경제부 차장
티엘은 창업 직후 한 연설에서 “잃어버릴 수도 있고 닳아 없어질 수도 있는 지폐가 아닌 더 안전하고 편리한 ‘돈’의 형태가 필요하다. 인터넷이 확산되면 페이팔이 전 세계 사람들에게 서비스를 제공하게 될 것이다”고 말했다. 티엘의 예측은 맞아떨어졌다. 2002년 세계 최대 온라인 쇼핑몰인 이베이에 인수된 페이팔은 빠른 속도로 가입자를 늘려 나갔다. 지난해 세계 198개국에서 1억5000만 명의 회원이 28개 화폐로 1750억 달러(약 190조 원)를 페이팔로 결제했다. 한 젊은이의 비전이 세계 금융거래 행태를 바꿔 놓은 것이다. 아마 티엘도 자신의 구상이 이렇게까지 큰 성공을 거두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페이팔이 창업된 지 16년의 세월이 흘러 한국에는 지금 핀테크(FinTech) 열풍이 불고 있다. 핀테크는 금융(Financial)과 기술(Technology)의 합성어다. 첨단 IT와 금융이 결합돼 금융소비자들이 더 안전하고 편리하게 금융거래를 할 수 있도록 해주는 기술과 상품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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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가들은 정확한 변화상을 예측할 수는 없지만 분명 엄청난 지각변동이 일어나고 있음을 느낀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동아일보가 ‘핀테크 금융혁명이 온다’ 시리즈를 준비하며 국내 금융사 스마트금융 담당 임원과 전문가 30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설문조사에서 19명이 ‘향후 10년 내에 지금 있는 시중은행 점포의 절반 이상이 사라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핀테크 관련 취재를 위해 만난 금융회사 최고경영자(CEO)와 임원들의 반응은 엇갈렸다. ‘핀테크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회사의 생사가 달려 있다’고 긴장하는 사람도 있고 ‘아직 현실과 동떨어진 얘기’라고 느긋해하는 임원들도 있다. 이를 반영하듯 금융계에는 스마트금융 전담 조직을 만들어 변화를 선도하려는 회사가 있고 마지못해 끌려가는 듯한 회사도 있다.
원하든 원치 않든 우리는 이미 핀테크 혁명의 소용돌이 한복판으로 진입하고 있다. 아직 준비가 안 돼 있다고 해서, 시간을 벌고 싶다고 해서 외면할 수 없다. 금융회사가 정부의 보호와 규제 속에서 시장을 나눠 먹는 시대는 이미 지났다. 새로운 기술과 비즈니스 모델을 찾으면 살아남고 그렇게 하지 못하면 낙오한다.
우리나라 금융산업은 지난 1년간 5만 개의 일자리가 줄어 현재 84만 개의 일자리를 제공하고 있다. 10년 후, 20년 후 이 중 몇 개의 일자리가 남아 있을 것인가. 16년 전 페이팔을 만든 티엘처럼 미래를 내다보는 CEO가 지금 우리 금융계에 얼마나 있느냐가 결정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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