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수 연세대 교수 행정학
마지막 어전회의에는 이용직도 있었다. 나흘 전 각의에서 합병조약안이 논의되자 학부대신이었던 그는 “이 같은 망국안(亡國案)에 목이 달아나도 찬성할 수 없다”고 반대했다. 매국노들은 8월 20일 그를 일본의 수해지역 방문 특사로 지명하여 즉시 떠나도록 명했다. 이용직은 이질을 핑계로 출발하지 않은 채 집에 칩거했다.
강압과 음모에 죽음으로 맞선 사람들은 민초와 선비들이었다. 이미 수십만 명이 의병을 일으켜 그중 적어도 십만 명 이상이 목숨을 잃은 상태였고, 국난의 책임을 자임하며 목숨을 끊는 사람도 속출했다. 전라도 구례의 매천 황현이 오백 년 선비를 키운 나라에서 책임지는 사람이 있어야 할 것 아니냐며 자결을 하는 이야기는 가슴이 아파 도저히 한숨에 읽어내려 갈 수가 없다. 그는 숨을 거두기 전 동생의 품에 안겨 “죽는 것도 쉽지 않구나. 독약을 마실 때 세 번이나 입을 떼었으니, 내가 이렇게 어리석구나” 했다. 데라우치는 그의 일기에서 ‘마지막 어전회의와 조약의 서명이 순조로웠다’고 적었으나, 거짓이었다.
역사는 의미의 기록이다. 시대의 구성원들이 각자의 삶을 다양하게 살아가는 것 같지만, 뜻을 세워 살아간 사람들의 정신을 기억한다. 조선의 뒤를 이어 대한제국이 속절없이 망하고 역사가 단절되는 듯했으나, 민초와 선비들이 죽음으로 식민지 역사는 일시적 ‘휴회’였음을 선언했다. 그것이 비록 치욕이기는 했으나 그 덕에 머지않아 8·15 광복이 왔을 때 후손들은 떳떳하게 역사의 ‘속개’를 다시 선언할 수 있었고, 그 위에 오늘의 우리가 있다.
지금 이 시점에 나라의 주권을 다른 나라에 양도해야 한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없다. 그러나 애국과 매국의 경계를 모호하게 혼동시키며 부패한 돈을 탐하던 이완용처럼 국민의 판단을 흐리며 부패한 돈을 챙기는 지도자는 너무나 많다. 공천 장사와 입법 청탁을 일삼는 국회의원, 공익을 버리는 대가로 자리를 보장받는 관료, 원전과 철도의 위험 앞에 국민을 내모는 공기업 사장. 이들이 바로 이 시대의 이완용이고 윤덕영임에 틀림없다.
교황의 방한 행렬에 구름처럼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어 위로를 구하는 풍경을 바라본다. 사랑의 사도에게 경의를 표하는 걸 넘어, 국가기관과 지도자들에 대하여 신뢰를 상실한 사람들의 애절함과 간절함이 거기에 배어 있다. 자신을 희생하고 헌신하여 사회적 공의(公義)를 세우는 리더십이 그리운 때다.
이종수 연세대 교수 행정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