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작 홍수 속 빛나는 독립영화 ‘숫호구’와 ‘족구왕’
서른 살 숫총각 백수를 다룬 영화 ‘숫호구’(위쪽 사진)와 족구하는 복학생이 주인공인 ‘족구왕’. KT&G상상마당·엣나인필름 제공
최근 ‘명량’이 한국 영화 흥행사를 새로 쓰고 있듯 숫호구도 범접하기 힘든 기록을 세운 작품으로 남을 공산이 크다. ‘극장에 걸린 가장 제작비가 적게 든 장편영화’로.
“단돈 100만 원으로” 영화에 뛰어든 백승기 감독은 촬영, 편집을 끝낸 뒤 통장에 30만 원을 남겼다. 일단 출연료가 제로였다. 주인공은 본인이 맡았고 나머지 배역은 지인이거나 꼬드기거나. 영화 속 부모도 진짜 아버지 어머니가 나오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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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다 보니 때깔은 당연히 후지다. 연기도 어색하고, 편집은 조악하다. 내용은 더 구리다. 서른 살이 되도록 연애도 취직도 못해 본 주인공 원준은 안타까운 외모와 스펙 0%의 ‘숫총각+호구’. 성경험은커녕 여자들에게 맞고 다닌다. 그런데 웬 생명공학 박사가 섹시매력 충만한 ‘아바타’를 개발했다며 실험 대상으로 원준을 유혹한다.
숫호구는 개연성도 설득력도 떨어지지만 웃기고 슬프다. 뭘 해도 나아질 게 없는 청춘일지언정 진심과 사랑은 소중할 터. 하지만 그 사랑을 위해 모든 것, 심지어 자신의 존재조차 부정해야 한다면 그건 올바른 선택일까. 특히 처연하기까지 한 영화의 끝자락은 울림이 크다. 감독의 호기로운 반문이 스크린을 꽉 채운다. “허술하면, 어색하면 왜 안 되지?”
○ 천만 영화 안 부러운 쌈빡한 웃음(그리고 눈물)
족구왕은 지난해 ‘1999, 면회’로 호평을 받았던 독립영화사 광화문시네마의 두 번째 작품. 제작비는 약 1억 원으로 숫호구에 비하면 블록버스터지만 마케팅 비용까지 200억 원 가까이 드는 요즘 대작들과 견주자면 ‘12 대 330척’ 싸움 저리 가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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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구왕은 잘 빠진 영화다. 스토리에 최적화된 캐릭터들이 돋보이고 흐름도 군더더기가 없다. 코미디 상업영화 공식을 지키면서도 통통 튀는 신선함이 살아있다. 특히 안재홍의 연기가 놀랍다. 진짜 군대 물이 덜 빠진 복학생을 마주한 기분이다. 여주인공 역시 연기가 욕설만큼 차지다.
하지만 이 코미디를 살리는 진짜 힘은 ‘암울한 젊음의 현실’이다. 전역한 지 얼마나 됐다고 공무원시험 준비하라 구박당하고, 등록금 대출이자에 알바를 몇 탕씩 뛰는데도 독촉 전화에 시달려야 하는. 그런데 연애는커녕 좋아하는 족구조차 맘대로 할 수 없다. “남들이 싫어한다고 자기가 좋아하는 걸 숨기고 사는 것도 바보 같다고 생각해요”란 한마디는 서글픈 청춘의 지친 어깨를 감싸는 위로다.
제작진은 “평소 독립영화는 1만 명이 목표지만 이번엔 10만 명 관람을 노려보겠다”며 호기로운 공약을 내걸었다. 천만 영화의 승승장구도 반갑지만 갖은 독립영화들이 수십만 명씩 들 날은 언제일지. 두 영화, 모두 그럴 자격이 있다.
정양환 기자 ra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