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기욱 미국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 소장
그동안 일본은 역사 문제로 미국으로부터 압박을 받아왔다. 중국의 부상으로 요동치는 동북아 질서에 대응하기 위해 미국으로선 주요 동맹국인 한일 양국의 협조가 절실하기에 일본이 역사 문제로 한국을 자극하지 말 것을 촉구해 왔다. 특히 위안부 문제에 대한 전향적 입장을 정리한 1993년 고노담화 수정을 반대해왔다.
이번 고노담화 검증은 이러한 미국 측 요구를 수용하면서도 아베 정부는 갈 길을 가겠다는 뜻을 천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즉 담화의 내용 자체는 수정하지 않으면서도 한일 간 정치적 타협의 산물인 것처럼 규정하여 사실상 담화의 정신을 훼손한 것이다. 한국으로선 괘씸한 일이지만 미국 등 국제사회 입장에서는 일본이 나름대로 그들의 요구를 수용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담화 검증 후 추진한 집단적 자위권 용인에 대해 미국이 적극적인 지지를 보인 데서도 알 수 있다.
일본은 담화검증문을 일본어와 영어로 동시에 발표하면서 외신을 비롯해 미국 내 아시아 전문가 그룹을 대상으로 대대적인 홍보를 전개하였다. 검증이 한국보다는 미국 등 국제사회를 겨냥했던 일본의 전략을 읽을 수 있다. 이에 비해 한국은 이를 한일 양국 간의 이슈로 보면서 국제사회를 대상으로 일본의 의도와 왜곡된 사실을 반박하려는 노력이 부족하였다. 미국 내 한반도 전문가들조차 한국 정부가 작성한 반박 성명이 뭔가 설득력이 떨어지고 더구나 한 발짝 늦은 대응이었다며 안타까움을 나타내고 있다.
일본은 아베노믹스를 바탕으로 기나긴 불황의 늪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고 있으며 집단 자위권 행사 용인 등 매우 적극적인 외교 안보 전략을 구사하고 있다. 중국의 부상에 대응하여 미일 동맹을 더욱 강화하면서 야스쿠니신사 참배나 고노담화 검증 등 주변국의 눈치를 살피기보다는 국익을 위해선 갈 길을 가겠다는 의지를 표명하고 있다. 이를 위해 북한과의 협상도 마다하지 않고 그동안 강경히 고수해 온 대북 제재를 일부 해제하려는 적극성까지 보이고 있다.
박근혜 정부는 지역 내 국가 간 상호신뢰 구축을 통하여 동북아의 평화를 가져오겠다는 야심 찬 ‘동북아 평화구상’을 발표한 바 있다. 하지만 ‘아시아 패러독스’를 극복하기 위한 새로운 이니셔티브를 실행해 보지도 못한 채 일본과의 역사전쟁에 묶여 있다.
새 정부가 들어선 지 1년 반이 지나도록 한일 간에 정상회담이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또 과거와 달리 정치 외교 분야뿐 아니라 사회 경제 문화적 분야에까지도 부정적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일본 내 반한 감정은 늘어나고 한류의 영향은 시들해지는 가운데 한국을 방문하는 일본인 관광객 수도 크게 감소하고 있다. 자칫 최악의 상황에서 내년 한일 국교 정상화 50주년을 맞게 될지도 모른다.
동북아 질서는 요동치고 있다. 중국이 급격히 부상하는 가운데 미국은 ‘아시아 회귀’를 선언했으며 일본도 ‘정상국가’의 길을 가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한미일 공조는 예전 같지 않고 북한도 중국에의 과도한 의존에서 벗어나려 러시아 일본 등과의 접촉을 넓히고 있다. 10년 후의 동북아 외교 안보 지형이 어떻게 변할지는 아무도 장담하기 어렵다. 한국의 외교 안보는 분명 험난한 기로에 서 있다.
신기욱 미국 스탠퍼드대 아시아태평양연구소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