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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평인 칼럼]세월호는 도처에 있지 않다

입력 | 2014-05-13 03:00:00


송평인 논설위원

“엄마 아빠 보고 싶어. 배가 또 기울고 있어.” 세월호 침몰 당일 오전 10시 17분 세월호에 탑승한 안산 단원고 학생이 보낸 최후의 메시지다. 검경합동수사본부가 사고 전후 탑승객이 주고받은 메시지를 분석해 그제 공개한 것이다. 학생은 그 시간 이후에도 부모에게 메시지를 보냈을지 모른다. 그러나 그 시간이 세월호가 이승과 교신할 수 있는 마지막 시간이었던 모양이다.

나는 보름쯤 전 공개된 오전 10시 17분의 또 다른 메시지를 기억한다. 그것도 단원고 학생이 보냈다. “기다리래. 기다리라는 방송 뒤에는 다른 방송은 안 나와요”라는 내용이었다. 난 당시 한국일보 1면 사진을 스마트폰으로 찍어 간직하고 있다. ‘AM 10시 17분 마지막 카톡’이라는 글자 아래 배가 100도 가까이 기울어 이미 절반 넘게 잠긴 모습을 보여주는 사진이었다. 설명과 사진을 번갈아 보다가 화가 치밀어 한참을 서성거려야 했다.

잔인한 4월이었다. 어른이란 게 부끄러운 4월이었다. 우리 속에 이준석 같은 무책임은 없는가, 우리 속에 유병언 같은 탐욕은 없는가, 우리 속에 해경 같은 무능함은 없는가 묻는다면 누구도 자신 있게 없다고 말할 수 없다. 누구나 자기 분야에서 조금씩은 이준석이고, 조금씩은 유병언이고, 조금씩은 해경이다. 그럼에도 중요한 것은 정도의 차이다. 그 차이가 합법과 불법을 가르고 도덕과 비도덕을 가른다. 그 차이를 구별하지 않으면 자학(自虐)에서 헤어 나올 수 없다. 우리 모두 치료가 필요하다.

사회도 마찬가지다. 선진국이라고 해서 천민 자본주의적 요소가 없는 것이 아니고 우리나라라고 천민 자본주의적인 요소만 있는 것은 아니다. 주간 ‘한겨레21’은 이번 주 커버 사진에 ‘우리는 아직 세월호에 타고 있다’는 제목을 달았다. 다시는 이런 참사가 없도록 하자는 반성의 차원에서 그런 말을 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은 수사(修辭)로서나 통하는 말이다. 한 사회의 각 분야는 똑같은 정도로 합리적이지도, 똑같은 정도로 비합리적이지도 않다. 사회는 불균등하게 발전한다. 어디는 앞서가고 어디는 뒤처져 있다.

지난해 아시아나항공 승무원들은 미국 샌프란시스코 공항의 착륙 사고 당시 침착한 대응으로 인명 피해를 크게 줄여 칭찬을 받았다. 항공사는 정기적으로 실물크기 모형 비행기를 물 위에 띄워놓고 실제 비상 상황을 방불케 하는 훈련을 한다. 1년에 안전교육비로 고작 54만 원을 지급한 청해진해운과는 다르다. 과거 사고에도 불구하고 해운회사처럼 뒤처진 곳이 있고 과거 사고에서 배워 항공사처럼 앞서 가는 곳도 있다. 그것이 우리가 희망을 갖는 근거다.

연안 여객선을 한 번이라도 타 본 사람이라면 그것이 얼마나 뒤처진 교통수단인지를 느낄 것이다. 뭍에서 섬까지 한두 시간 가는 배만 있을 때는 그냥 넘어갔다고 치자. 수백 명의 승객과 수천 t의 화물을 싣고 1박 2일을 가는 배라면 더이상 우리가 아는 연안 여객선이 아니다. 카페리도 크루즈도 화물선도 아닌 것이 카페리와 크루즈와 화물선 역할을 다 하면서도 연안 여객선에 적용된 낡은 관행에 따라 취급된 것이 사고의 먼 원인이다. 큰 사고는 대개 새로운 것이 새로운 것으로 인식되지 못할 때 발생한다.

분노하라. 그러나 해결은 차가운 이성으로 추구해야 한다. 세월호가 도처에 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물을 너무 넓게 치는 것이다. 그런 식으로는 고기를 잡을 수 없을뿐더러 잡아도 건져 올릴 수 없다.

지도자라면 어디가 앞서고 어디가 뒤처져 있는지 구별하고 뒤처진 곳에 그물을 칠 수 있어야 한다. 정부도 재야도 국가 개조를 얘기한다. 다 좋다. 그러나 디테일이 없다면 참사는 되풀이될 것이다.

송평인 논설위원 pisong@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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