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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사 이정렬의 병원 이야기]의료계 수난시대

입력 | 2014-04-15 03:00:00


지난해 12월 15일 서울 영등포구 여의도광장에서 의사들이 ‘원격진료’ ‘영리병원’ 확대에 반대하는 시위를 하고 있다. 동아일보DB


이정렬 서울대병원 흉부외과

누가 뭐래도 요즘의 의료계는 수난시대다. 할 일(현안)은 많고 갈 길(국제화 산업화)은 멀고 경영도 어려운데 가족들(환자와 의료계와 정부)은 이해가 일치하지 않고 원격의료, 영리 자법인, 수가구조 개선 등에 대한 집안(의료계) 내 의견도 분분하다. 의사의 한 사람으로서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존경은커녕 불평불만의 대상만 되는 요즘, 우리가 정말 존재 의미가 있나 회의감이 들 정도다. 설상가상으로 오해를 부추기는 말들이 난무해 상처를 준다.

‘의사 파업 알고 봤더니 속내는 수가 인상’ ‘대형병원이 보험 재정의 3분의 1 독식(환자 쏠림)’ ‘비급여(환자 부담) 부분 증가율이 1년 새 두 배로 껑충’….

하지만 의사들의 속앓이도 심하다. ‘비정상적 저수가 정책에 따라 병원 생존조차 위태롭다’ ‘수가 인상이 아니라 수가 현실화(정상화)가 정확한 표현이다’ ‘비급여 증가는 보험재정만으로 진료비를 100% 보장할 수 없기 때문에 불가피하다’….

같은 현상을 놓고 어떻게 이렇게 입장이 다를 수 있을까. 꼬인 실타래를 어디서부터 풀어야 할까. 우선 어렵게 시작된 의정(醫政) 협상 테이블에 바란다. 단기 땜질식 대책 내놓기에 연연하지 말고 장기적인 틀에서 국민에게 신뢰와 존경을 받는 의료계와 정부가 되기 위해 노력해 달라고. 마침 규제개혁 분위기도 싹트는 마당에 근본 원인부터 진단하여 판도라의 상자 속에도 성과(진리)가 있을 수 있음을 보여주자.

우선 ‘원격진료’ 해법부터 보자.

나는 ‘원격진료’를 ‘인터넷뱅킹’에 비유해 보고 싶다. 한국 사회 수많은 금융거래(진료)가 시도 때도 없이(병원 24시) 수만 건씩(수많은 환자) 쏜살같이(응급진료) 실패 없이(의료의 질 관리) 이뤄지는 모습 말이다. 한국은행(국가중앙병원), 민간은행(대형병원), 특수목적은행(전문특화병원), 저축은행(지방의료원), 새마을금고(개원가) 등 다양한 형태의 금융기관들이 기간망과 시스템을 유기적으로 엮어 은행 거래에 엄청난 편리를 주고 있다. 기관 간 기능 분담으로 기관별 이해 갈등도 별로 없다. ‘한국형 원격의료’를 이런 점에 착안해 의료전달 체계의 국가전산망 기반의 ‘실시간 의료정보 내비게이터’라 정의하면 어떨까. 그리하여 인프라를 구축한 후 시스템 틀 안에서 역할과 기능을 분담하는 독창적인 의료 한류 모델로 탄생시킬 수는 없을까.

한국은 인구 규모(통일이 되어도 7500만 명) 대비 정보통신기술(ICT) 역량이 자타 공인 모두 세계 최고다. ‘인터넷뱅킹’이 아니라 ‘인터넷 호스피털링(hospitaling)’이 태어나기에 최적의 조건인 것이다. 이어서 보안, 안전장치, 기능 분담, 수가구조, 기대효과 등을 계속 과제로 풀어 나간다면 ‘원격진료’는 국민 모두에게 득이 되는 의료 창조물이 될 것이다.

영리 자법인 허용 또는 불용 논쟁도 뜨거운 감자다. 장단점은 충분히 논의되었으나 허용 불용에 대한 근거가 증명된 바는 없다(해본 적이 없으므로). 이제 ①어떤 형태로든 의료계로 유입되는 투자를 증가시켜 의료 분야도 차세대 국가 성장 동력 창출의 역군이 될 수 있는지 실험이라도 해보든지 ②걱정되고 예상되는 결과가 국민 건강관리를 갉아먹는 ‘독(毒)’이라 인식된다면 여기서 논란을 중단하든지 결단할 때가 왔다.

하지만 집어치우기에는 지금까지 이루어 놓은(세계가 알아주는) 한국 의료 수준과 거기서 파생될 수 있는 결과물(국제화 산업화할 수 있는 산출물)을 볼 때 포기하기에 너무 아까운 면이 있다.

우리의 자랑거리인 건강보험제도와 내국인 진료에 후퇴를 초래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영리 병원이건, 영리 자법인이건 한번 허용해 보고 여기서 창출된 부가가치가 국민 건강 향상과 국민 진료비 부담 감소에 재투자되어 공공의료 발전에 기여할 수 있도록 만드는 지혜 창출은 정녕 불가능할까. 내국인 진료 차별, 쏠림 현상, 의료비 상승 등 예상되는 ‘독’의 정체는 많이 노출되었다. 하지만 노출된 문제점이라면 극복도 가능하지 않을까.

‘수가 인상’에 관한 오해와 진실도 국민과 의료계를 모두 안타깝게 하고 있다. 그런데 수가를 인상하려면 왜 올려야 하는지 근거가 있어야 하지 않겠나. 근거를 제시하려면 근거가 존재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한국형 표준 진료지침’의 마련이 절실하다.

현재 환자 입장에서 가장 부담스러운 것 중 하나가 병원마다 다른 진단과 치료 패턴이다. 위암을 예로 들어보자. 위암을 조기에 발견하려면 어떤 검진 가이드라인이 필요한가? 발견한 위암을 적시에 치료하려면 어떤 진단, 검사와 수술 가이드라인이 필요한가? 생존율을 높이려면 어떤 ‘수술 후 치료 가이드라인’을 준비해야 하나? 위암에 관하여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학문적 보고와 우리의 경험을 바탕으로 하는 근거 중심의 가이드라인을 구축한다면 언제 어디서 누구에게 진단, 치료를 받건 동일한 진료를 받게 되므로 결국 의료의 질은 물론이고 비용 효율 면에서도 유리할 것이다.

다행인 것은 대한의학회의 임상진료지침사업단이 이미 작업을 시작했다는 점이다. 워낙 방대한 작업이라 시간과 전문가가 많이 필요할 것이지만 서두르지 않고 단계적 목표를 잡아 추진한다면 머지않은 장래에 신뢰할 수 있는 ‘한국형 임상 진료지침’이 완성될 수 있다. 이것은 또한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이미 시행하고 있는 진료패턴을 통합해서 활용하는 것이라 분명히 실현 가능하다.

우리에게는 현장 중심의 원가 계산 잠재력이 매우 강한 대형병원 원무팀들이 있다. 이들이야말로 진료패턴과 원가와 표준화 작업의 전문가들이다. 건강보험심사평가원이나 건강정책심의위원회도 이 작업에 힘을 실어야 한다. 이렇게 해서 구축되는 임상 진료지침과 거기에 소요되는 비용을 근간으로 건강보험 재정의 씀씀이에 대한 큰 그림을 그리면 된다.

의료계도 동일한 질병에 대해 병원별, 의사별로 중구난방으로 해오던 치료를 표준 범위로 모을 때가 되었다. 매년 수정, 보완한다면 갈등이 적은 지출이 가능해질 것이다. 정부와 의료계 차원에서도 국민에게 사실을 정확히 알릴 수 있는 무기를 확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도 더 드는 비용이 있다면 실손 보상 형태의 사(私)보험(이미 상당한 가입자가 있음)이나 본인 부담 등 추가 재원으로 충당하거나 공공의료 차원에서의 기금 확대로 해결하는 것이 상식적인 ‘적정 수가’가 아니겠는가. ‘무조건 무상’이나 ‘무데뽀 삭감’으로 상처 받는 일도 없어질 것이 확실하다.

이정렬 서울대병원 흉부외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