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의 아버지 [잊지 못할 말 한마디]윤병무 시인
윤병무 시인
나를 비롯해 대부분의 학생은 팔을 들어 올릴 일이 별로 없었지만, 간혹 어떤 학생은 계속해서 들고 있는 오른팔이 아파 왼팔로 오른팔을 지지하는 퍼포먼스까지 연출했다. 5학년 때까지의 그런 조사 방식이 6학년에 올라오자 설문지로 바뀌었다. 아마 내가 다닌 학교가 시범학교로 지정되어 그나마 선진적인 방식을 따랐던 터였으리라. 방과 후 집에서 나는 설문지를 읽어가며 다를 바 없는 질문들에 신속하게 체크했다. 그러다 부모님의 최종 학력을 묻는 질문을 놓고 잠시 고민했다. 결국 어머니는 ‘중졸’에, 아버지는 ‘고졸’에 표시했다.
저녁에 아버지께서 귀가하셨다. 누나, 형과 함께 쓰는 책상에 놓인 그 설문지를 보셨던가 보다. 저녁식사를 마치자 아버지께서 옆방으로 나를 부르셨다. “병무야, 왜 설문지에 거짓말을 했냐?” 나는 무슨 말씀인지 바로 알아차렸다. ‘네 부모 모두 국졸(초등학교 졸업)인데, 그리고 그걸 네가 잘 알고 있는데, 왜 거짓으로 표시해 놓았느냐?’라는 뜻이었다. 나는 ‘창피해서요’라고 말씀드리지 못하고 거멓게 탄 종이장판만 내려다보고 있었다. 잠시 침묵이 흐르고 아버지께서 말씀하셨다. “그런다고 사실이 바뀌지는 않아.” 그러고는 방바닥에 놓인 설문지를 내게 돌려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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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여 년 후, 그날 같은 3월 어느 날 저녁, 우리 집에서 영장 없이 끌려간 내가 국가안전기획부(현 국가정보원)에서 47시간 동안 취조받고 나왔을 때, 그리고 또 다른 한밤에 피투성이가 된 친구가 병원 응급실에서 내게 도움을 청했을 때, 언제 와 계셨는지 저물녘 어느 다방 건물 앞에서, 또 새벽녘 종합병원 응급실 문 앞에서 우두커니 나를 기다리시던 아버지께서는 귀갓길에 아무 말씀도 없으셨다.
아들에게 나쁜 일이 생기지 않을까 해서 마음 졸이셨겠지만,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지는 않아’라고는 차마 아들에게 말씀하시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불측지연(不測之淵). 연못의 깊이를 알 수 없기에 불안하셨겠지만, 당신께서 박아놓은 말의 돛이 이미 펼쳐졌기에 묵묵히 지켜보고 계셨던 것이다. 그것이 말의 운명이다.
윤병무 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