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진핑의 난징학살 비판은 경제, 군사에 이은 ‘역사 굴기’ 안중근 모른 척하다가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는 정치적 계산의 발로 피해자로 살아온 우리에겐 냉철한 역사인식이 필수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난징은 중국 양쯔 강 하류에 있는 도시다. 중국 국민당 정부가 수도로 삼았던 이 도시에 1937년 일본군이 진군하면서 대량 학살이 자행됐다. 희생자 규모에 대해 중국은 30만 명 이상이라고 주장한다. 시 주석은 취임 후 첫 유럽 순방이었던 이번에 작심하고 난징대학살 얘기를 꺼냈다. 독일을 발언 장소로 택한 것은 ‘과거사를 반성하는 독일’을 일본과 대비시키려는 의도였음이 분명하다.
중국인들은 일본 하면 난징대학살을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1970년대 초만 해도 난징대학살은 중국 사회의 관심권에서 벗어나 있었다. 중국 당국은 난징대학살을 다루더라도 당시 미국 선교사들이 일본군에 협조한 일이나, 국민당 정부가 난징을 포기하고 후퇴한 것을 주로 부각했다. 미국 대만 등 반공(反共)세력에 대한 공격의 소재로 활용한 것이다.
반면 중국은 한국을 향해서는 “일본을 상대로 ‘역사 공조’를 하자”는 손짓을 보내고 있다. 안중근 의사가 1909년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한 하얼빈 현장에 표지석을 세워 달라는 박근혜 대통령의 요청에 중국은 ‘안중근 기념관’을 세워 통 크게 화답했다. 이에 박 대통령은 6·25전쟁 때 전사한 중공군 유해를 중국에 돌려보냈다. 일본군 위안부 관련 자료를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공동으로 등재하려 한다는 소식도 들린다. 한국 내에서도 ‘역사 공조’ 움직임을 반기는 분위기가 있는 듯하다.
그러나 현실은 내민 손을 선뜻 주고받을 만큼 단순하지 않다. 안중근 표지석만 해도 중국의 반응은 얼마 전까지 우리에게 푸대접 그 자체였다. 2009년 안중근 의거 100주년을 맞아 하얼빈에서 우리 측이 개최하려던 행사들은 줄줄이 불허되거나 축소됐다. 2006년 한국인 사업가가 하얼빈에 세웠던 안중근 동상은 10여 일 만에 철거됐다. 중국의 돌연한 태도 변화에서 한국을 끌어들이려는 계산을 읽어내기는 어렵지 않다.
2010년 중국과 일본은 공동 역사연구를 하고 보고서를 내놓은 적이 있다. 2000년대 후반 일본의 역사 왜곡 문제로 중국에 반일 정서가 높아지자 양국 학자들이 만나 연구한 결과물이다. 중국의 학자들은 한반도 역사와 관련해 중국이 세운 한사군부터 서술을 시작함으로써 우리 민족 최초의 국가인 고조선을 부정했다. 또 고대 일본인이 한반도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며 일본 편을 들기도 했다. 일본 학자들 역시 고대 일본이 한반도를 군사적으로 지휘했다고 주장했다. 중국과 일본이 한반도 고대사에서 각각 한국보다 우월한 위치에 있었다는 서술 방향에 서로 뜻이 맞은 것이다. 한국 역사는 무시되고 반론을 제기할 여지도 없었다. 역사 문제에서도 그때그때 국가 사이의 냉정한 이해관계가 존재할 뿐 ‘역사 공조’는 현실성 없는 신기루에 불과하다.
이번 시 주석의 독일 방문에 앞서 중국은 베를린의 홀로코스트(유대인 학살) 추모관에 시 주석이 참배할 수 있게 해달라고 독일 측에 요청했으나 거절당했다. 중국과 일본의 역사 갈등에 독일이 휘말릴까 경계한 것이다. 이처럼 강대국들도 다른 나라의 역사 갈등에 개입을 꺼린다. 한국이 중국과 역사 문제에서 부분적으로 협력할 일이 있을지는 모른다. 하지만 중국 역사로부터 피해만 당해온 한국이 ‘역사 공조’에 나설 일은 아니다.
홍찬식 수석논설위원 chansik@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