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태원 정치부 차장
“이게(통합 논의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알아야 이 자(안철수)가 나한테 얼마나 거짓말을 했는지 알 수 있다.”
윤여준이 만 하루도 안 돼 ‘농담’이라고 둘러댄 발언이지만 우스갯소리로 치부하기엔 진심이 너무 많이 녹아있는 듯하다. 꾹꾹 눌러놨던 분노가 배신감으로 폭발한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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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철수를 두둔할 뜻은 없다. 하지만 윤여준에게서 노욕(老慾)을 느꼈다는 사람이 많다. 윤여준의 격정토로는 한때나마 의기투합했던 ‘보스’를 향한 안타까움이기보다는 본인이 원하는 뭔가가 이뤄지지 않는 점에 대한 짜증 또는 불안감처럼 들린다.
올해 75세로 국회의원, 장관, 청와대수석비서관, 교수, 연구소장, 기자 등 안 해본 것이 없는 것 같아 보이는 윤여준이 진짜 원했던 것? 이루지 못한 성공한 책사(策士)의 길? 아니면 프리드리히 니체가 인간의 삶(leben) 자체라고 했던 권력에의 의지(wille zur macht) 실현?
중국의 마오쩌둥(毛澤東)은 권력욕의 화신으로 여겨진다. 헨리 키신저는 1975년 10월 나눴던 마오와의 생전 마지막 대화를 생생하게 기억한다.
“우리(마오, 저우언라이를 지칭) 늙은 것들로는 안 된다니까. 우리가 뭘 이룩할 것 같지는 않아요. 알잖아요, 내가 손님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진열장 같은 존재라는 걸.”(중국 이야기 38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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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지방선거를 앞둔 우리 정치판에서도 낯설지 않은 장면이다. 키신저라면 5선 도지사 경력도 모자라 지난해 1만7000여 명의 지지자를 이끌고 새누리당에 입당한 우근민 지사의 행동을 소명(召命)의식으로 여길까?
삼봉(三峯) 정도전 이래 우리에겐 왜 진정한 책사가 없었는지에 관심을 가진 적이 있다. 버락 오바마를 미국 최초의 흑인대통령으로 만든 데이비드 액설로드(민주당)나, ‘라이트 네이션(right nation·우파의 나라)’을 개념화했던 칼 로브(공화당) 같은 전략가들.
윤여준은 자신의 책 ‘대통령의 자격’에서 “국가의 흥망성쇠를 좌우하는 가장 결정적 요인은 대통령의 스테이트크래프트, 즉 국가를 운영하는 자질과 능력”이라고 했다. 안철수의 ‘새정치’로 세상을 바꿔보려고 했지만 불행히도 그의 실험은 실패로 끝난 듯하다. 명예롭게 스스로 물러날 기회도 놓쳤다.
지난주 ‘책사 윤여준’은 수명을 다했다. 안타깝게도 마지막이 아름답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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