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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룸/하정민]아름다운 라이벌

입력 | 2014-03-04 03:00:00


하정민 국제부 기자

“피겨 역사상 우리만큼 꾸준히 경쟁한 사례는 없었다. 경기를 끝내고 아사다가 눈물을 흘릴 때 나도 울컥했다.”(김연아)

“서로의 존재가 있어 성장할 수 있었다. 그간 고생했다고 말해주고 싶다.”(아사다 마오)

라이벌(rival·경쟁자). 강가를 뜻하는 라틴어 리파리아(riparia)에서 유래했다. 물이 귀하던 시절 강을 경계로 마주 선 두 부족은 평소 친한 이웃이었어도 가뭄 때는 피가 튀는 대결을 벌였다. 다만 아무리 경쟁이 치열해도 상대를 죽이려고 강에 독을 타지 않는다는 불문율만은 지켰다. 나 역시 그 물을 먹고 죽기 때문이다. 이처럼 서로를 존중하며 건전한 경쟁을 벌여 더 발전하는 관계가 라이벌이다. 상대를 못 잡아먹어 안달인 구도라면 라이벌이 아니라 적(enemy)이다.

주니어 시절을 포함한 둘의 통산전적은 김연아 기준으로 10승 6패. 먼저 빛을 발했던 아사다를 김연아가 처음 이긴 건 2006년 초 세계주니어선수권대회다. 이때부터 본격화된 둘의 경쟁구도는 지난 8년간 세계 피겨계의 최대 화제였다. 시니어 시절 성적은 김연아가 훨씬 우위에 있었지만 한국과 일본의 특수한 관계, 같은 나이, 유럽과 북미가 지배하던 피겨계에 등장한 아시아 스타…. 세상은 두 10대 소녀를 끊임없이 비교하고 자극했다.

감수성이 극도로 예민한 시기에 어른들이 붙인 싸움을 감내해야 했을 둘의 고통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둘은 이를 뒤로하고 아름다운 연기로 마지막 올림픽을 마무리했다. 스물넷 동갑내기가 서로에게 보낸 진솔한 격려는 어지간한 잠언(箴言)보다 큰 울림을 준다.

강력한 라이벌의 장점은 무척 많다. 서로를 꺾기 위해 노력하다 보니 원래 좋았던 기량도 더 성장한다. 업계 전체의 발전도 뒤따른다. 김연아와 아사다 전에는 3회전 연결 점프를 제대로 뛰는 선수가 많지 않았지만 이제 상당수 주니어 선수도 이를 구사한다. 언론의 주목, 거액의 스폰서십, 강력한 팬덤이 절로 생겨나니 최고의 마케팅 수단도 된다. 김연아와 아사다가 없는 피겨, 페데러와 나달이 없는 테니스, 호날두와 메시가 없는 축구를 상상해보라.

라이벌 구도가 높은 진입 장벽의 역할도 한다. 코카콜라와 펩시콜라는 모두 19세기 후반 설립됐지만 120여 년이 지나도 둘의 아성을 깬 음료회사가 없다. 인종 성별 나이를 막론하고 전 세계 소비자가 ‘콜라는 코크(Coke) 아니면 펩시(Pepsi)’라는 명제에 세뇌당했다. ‘강산이 바뀌는 기간은 1년’이라는 연예계에서 10여 년째 예능프로그램을 독식하는 유재석과 강호동은 어떤가. 수많은 진행자 중 누구도 둘을 뛰어넘지 못했다.

이 각박한 세상에 아름다운 라이벌이 웬 말이냐고?

사는 게 힘들수록 스포츠 라이벌의 미학(美學)은 귀감이 된다. 지금 내가 정정당당한 경쟁을 하고 있는지, 경쟁이 끝난 뒤 김연아와 아사다처럼 서로의 앞날을 축복해 줄 수 있을지 가슴에 손을 얹고 생각해 볼 때다.

하정민 국제부 기자 dew@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