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진때 蘭 대신 그분 이름으로 기부… 더 향기롭네요
성프란치스꼬 장애인종합복지관 수녀들이 손수 만든 뷰티풀 도네이션 카드를 들고 환하게 웃고 있다. 왼쪽부터 박현애 로사, 관장인 이선영 데레사, 이혜연 미카엘라, 유혜정 마리나 수녀. 박영대 기자 sannae@donga.com
서울 서남쪽 끝자락에 위치한 구로구 가리봉동의 성프란치스꼬 장애인종합복지관. 이곳 관장인 이선영 데레사 수녀는 축하카드에 받는 사람의 이름을 적어 넣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한다. 많을 때는 하루에 20장의 축하카드를 쓴다.
“예전에는 여섯 줄 축사를 모두 손으로 썼어요. 요즘은 축사를 써달라는 분이 많아져 이름만 쓰게 됐죠. 진정으로 감사한 마음을 더 담지 못해 죄송하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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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녀님들이 카드 제작에 팔을 걷어붙인 것은 ‘아름다운 기부’(뷰티풀 도네이션)를 위해서다. 데레사 수녀는 색색의 꽃이 수놓인 여섯 종류의 카드를 자랑하듯 활짝 펼쳐놓고 웃으며 말했다. “신문에 나면 더 많은 분이 찾을 텐데…. 얼마나 더 그려 놓아야 할까요?”
‘골칫거리’가 된 승진 축하 선물
매년 인사철이면 기업체 사무실에는 ‘난(蘭)’과 ‘꽃’이 넘쳐난다. 이달 초 한 중견기업의 임원으로 승진한 김모 씨(44)는 거래처와 지인들로부터 축란을 60여 개나 받았다. 집에 개별적으로 배달된 난과 꽃까지 합하면 100개에 육박한다.
김 씨는 “난과 꽃을 보내준 마음은 고맙지만 한꺼번에 몰리다 보니 마땅히 보관할 공간이 없는 데다 관리하기도 쉽지 않다”고 했다. 그는 “하지만 이를 알면서도 나 역시 거래처에 축하할 일이 생기면 직원을 시켜 난을 보내곤 한다”고 털어놓았다. 달리 축하의 마음을 전할 방법이 없다는 얘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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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프란치스꼬 장애인종합복지관의 뷰티풀 도네이션은 2006년 소리 소문 없이 시작됐다. 승진 생일 등 축하할 일이 생긴 이의 이름으로 대신 기부를 하면 복지관에서 ‘수녀님 카드’와 기부금 영수증(연말정산 세액공제용)을 보내주는 제도다. 주는 사람은 의미 있는 축하를 할 수 있고, 받는 사람 역시 자신의 경사로 인해 누군가가 도움을 받는다는 생각에 마음이 넉넉해진다. 주고받는 사람 모두 나눔의 보람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모인 후원금은 복지관에서 소외계층인 여성 장애인들에게 한글과 컴퓨터, 기초영어를 가르치거나 검정고시 공부를 지원하는 등 각종 교육사업에 요긴하게 쓰인다. 이런 혜택을 받는 여성 장애인은 한 해 14만 명에 이른다.
소 사장은 “기부금 카드를 받아보고는 하나같이 다들 감동했다는 반응을 보인다”며 “얼마 전에는 거꾸로 내 기념일에 뷰티풀 도네이션을 해준 분도 있어 ‘기부 카드가 이제 자리를 잡아 가는구나’ 하는 생각에 가슴 뿌듯했다”고 말했다. 소 사장 외에 김윤 삼양홀딩스 회장, 임대기 제일기획 사장 등이 아름다운 기부를 실천하는 최고경영자(CEO)들이다.
작은 아이디어에서 시작된 기부 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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뷰티풀 도네이션의 아이디어는 ‘후원금 영수증’ 한 장에서 출발했다. 제일기획 김낙회 고문(당시 부사장)은 2005년 말 우연한 기회에 후원하게 된 성프란치스꼬 복지관으로부터 후원금 영수증을 받으면서 기부 카드 아이디어가 떠올랐다. 그러곤 당시 초대 관장이던 스텔라 수녀에게 카드 제작을 권유했다. 2002년 처음 복지관을 연 뒤 정부 보조금으로는 턱없이 부족한 운영비를 메우기 위해 음악 콘서트는 물론이고 바자회까지 안 해본 게 없었던 스텔라 수녀는 ‘새로운 기부 문화로 더 많은 이웃을 도울 수 있다’는 생각에 흔쾌히 이를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수녀들이 종이까지 손수 잘라 정성껏 그림을 그렸다. 하지만 아쉬운 대목이 발견됐다. 수녀들의 정성은 느껴지지만 고급스러워 보이진 않는다는 것. 김 고문은 카드 디자인에 일가견이 있는 제일기획 직원들을 복지관으로 파견했다. 국내 최고의 홍보 전문가들은 ‘종이는 오톨도톨한 재질을 사용해 고급스럽게 보이도록 하자’ ‘꽃만 그려 넣을 게 아니라 카드 하단과 뒷면에 뷰티풀 도네이션 활자와 복지관 이름을 깔끔하게 인쇄해 홍보 효과를 높이자’는 제안을 쏟아냈다. 홍보 전문가와 수녀, 복지관 직원들이 머리를 맞댄 끝에 지금의 카드 봉투, 속지, 안내장 디자인이 탄생했다.
아이디어가 더해지자 후원은 크게 늘었다. 지난해 이 카드를 선물 받은 사람은 296명. 2006년 200만 원에 불과하던 후원금은 2008년 2357만 원, 지난해 4400만 원으로 매년 늘고 있다. 이제는 복지관이 벌이는 사회봉사 활동의 효자 노릇을 하고 있다. 김 고문은 “작은 아이디어에서 시작됐지만 소박하면서도 의미 있는 기부문화로 더 활성화됐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기업인에서 일반인까지 폭넓은 인기
뷰티풀 도네이션은 초기에 일부 기업인만 활용했지만 이제는 일반 시민에게도 제법 알려졌다. 데레사 수녀는 “자녀가 어린이집에 다니는 학부모가 담당 선생님에게 카드를 선물하거나 결혼기념일에 보석을 사주는 대신 그 돈으로 기부를 하는 부부까지 다양하다”고 전했다.
백남돈 씨(54·보험설계사)는 지인이 승진했을 때 꽃 대신 의미 있는 선물을 고민하다 뷰티풀 도네이션을 알게 됐다. 지난해에만 5건을 후원했다. 백 씨는 “몇 년 전 처음 이 선물을 했을 때는 지인이 전화를 걸어와 ‘이게 무슨 희한한 카드냐’고 물어올 정도로 생소한 개념이었다”며 “하지만 이제는 선물 받은 사람들이 감사 편지를 보내줄 정도로 서로에게 기분 좋은 활력소가 되고 있다”고 말했다. 뷰티풀 도네이션은 어느덧 부산 지역까지 퍼져 부산 당감종합사회복지관에서는 뷰티풀 도네이션과 비슷한 ‘도네이션 플러스’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일부 기업에서는 뷰티풀 도네이션의 ‘응용편’까지 등장했다. 대한전문건설협회 서울시회 조성호 대리(38)는 최근 동료 19명과 함께 협회 심상조 회장으로부터 뷰티풀 도네이션 카드를 받았다. 특별한 날은 아니었지만 회장이 헌혈에 동참한 직원들의 이름으로 대신 기부를 해준 것.
스마트폰으로 QR코드를 찍으면 지난 커버스토리를 보실 수 있습니다.
뷰티풀 도네이션에 참여하려면 담당자에게 e메일(fwc1209@hanmail.net)을 보내거나 성프란치스꼬 장애인종합복지관으로 전화(02-830-6500)하면 된다. 서울 마포구의 정신장애인 재활기관인 태화 샘솟는 집(02-392-1155)도 비슷한 성격의 ‘선한 씨앗 카드’를 운영하고 있다.
장선희 기자 sun10@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