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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arrative Report]예술의 나라… 천년 성당 되살린 ‘동방의 빛’

입력 | 2013-11-14 03:00:00


‘빛의 화가’ 김인중 신부가 프랑스 중부 디엔오비니에 있는 11세기 고딕양식의 ‘생 피에르 생 폴’ 성당에 직접 그린 스테인드글라스를 바라보고 있다. 김 신부는 현대미술의 추상화와 동양의 선화를 연상시키는 독특한 화법으로 1000년이 넘는 프랑스 성당들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바꿔 나가고 있다. 조엘 다마스 제공

5년간의 암 투병 끝에 9월 세상을 뜬 소설가 최인호. 그가 마주했던 내면의 고독은 얼마나 깊었을까. 부인 황정숙 씨는 최근 유품을 정리하다가 남편의 책상에서 하얗게 말라붙은 눈물자국을 발견했다. 고인이 기도하며 눈물을 흘렸던 책상에는 원고지에 쓴 미발표 글들이 있었다.

“김인중 신부님은 항상 2015년 둘이서 같이 공동작업을 하자고 말씀하셨다. 그 말이 참 좋다. 고맙다. 김 신부님의 편지를 다시 읽어보면 단어 하나마다 영성이 깃들어 있음을 느낀다. 2015년이면 앞으로 2년 후. 아아. 김 신부님과 함께 공동작업을 할 수 있다면…. 2013년 1월 4일 오후 7시 50분.”

최 작가 특유의 악필이 그대로 살아 있는 이 메모는 읽어내기가 무척 힘들다. 그러나 그는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도 2년 뒤 김 신부와 공동으로 창작집을 내겠다는 강렬한 의욕을 내비친다. 그가 그토록 평생 존경하고 사랑했던 김인중 신부(73). 그는 누구일까.

프랑스 도미니크수도회 소속 사제인 김 신부는 프랑스에서는 ‘빛의 화가’로 더 널리 알려져 있다. 그는 현대적 추상화와 동양화를 접목한 독특한 화법으로 1000년이 넘은 프랑스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에 새로운 빛을 불어넣고 있다. 공영방송 ‘프랑스 2TV’는 올해 크리스마스에 김 신부의 예술세계를 조명하는 다큐멘터리를 방영할 예정이다.

5월 김 신부는 벨기에 국민 통합의 구심점으로 추앙받는 다넬스 추기경과 함께 시를 쓰고 그림을 그린 한글과 프랑스어로 된 시화집(詩畵集) ‘80’(프랑스 Cerf와 한국 여백미디어 공동 출간)을 발표했다. 최 작가와 김 신부가 2년 뒤 함께 내기로 한 책도 이런 것이었다. 최 작가는 죽기 직전 한국을 찾아온 김 신부 앞에 무릎을 꿇고 인생을 참회하는 고백성사를 하기도 했다.

“오늘 성당에 설치할 스테인드글라스를 갓 구워 냈습니다. 햇빛에 비춰 보면서 늘 투명한 빛과 함께하실 최 선생님을 생각했습니다. 베드로 성인처럼 눈물을 많이 쏟으셨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최 선생님의 눈물은 아마 지상에서 누렸던 짧고 허무한 속세의 빛에 대한 통회의 눈물이 아니었을까 싶습니다. …2015년 시화집을 함께 내기로 한 저와의 약속. 쉽지는 않겠지만 하느님이 하시는 일이라면 이뤄질 수 있다고 굳게 믿었습니다.”(김인중 신부, ‘최인호 추도사’ 중에서)

○ 천년 묵은 대성당을 변화시킨 새로운 빛

지난달 초 프랑스 중부 리무쟁 지방의 작은 도시 오르냐크. 이른 아침부터 찾아온 순례객들의 발길로 붐볐다. 12세기에 세워진 고딕 양식의 생 마르시알 성당이 김 신부의 스테인드글라스로 다시 태어난 지 1주년을 기념하는 음악회가 열렸다.

기념 미사와 연주회가 끝난 후 갑자기 객석에선 낮은 탄성이 새어나왔다. 스테인드글라스를 통과한 늦은 저녁 햇살이 성당의 벽돌에 비쳐 데칼코마니 같은 환상적인 문양을 만들어냈기 때문이다. 유리창을 통과한 빛은 시시각각 생명처럼 붉은 핏빛으로 타오르다가, 검은색 죽음의 고통을 선보이는가 하면, 찬란한 노란색으로 부활의 기쁨을 노래하기도 했다.

이를 지켜보던 오르냐크의 전 시장 장 푸제 씨(82)는 2년 전 인근 브리우드의 대성당에서 김 신부의 스테인드글라스를 처음 접했을 때의 감동을 떠올렸다. 그가 태어나서 그런 스테인드글라스를 본 건 처음이었다. 유리창엔 성모마리아도, 성인도 그려져 있지 않았다. 그저 커다란 붓으로 자유분방하게 펼쳐놓은 그림은 서양의 추상화 같으면서도, 동양의 선화(禪畵)나 수묵 담채화처럼 오묘하게 보였다. 그는 순간적으로 깊은 명상에 빠졌다.

“신부님, 제발 우리 성당에 꼭 한번 와주십시오.” 푸제 씨는 김 신부를 수소문해 전화를 걸었다. 김 신부는 바쁜 일정에도 산골마을을 찾았다. 그로부터 1년 후. 김 신부가 그린 스테인드글라스는 오르냐크 마을을 바꿔놓았다. 브리우드와 오르냐크의 천년 묵은 성당을 현대적으로 바꿔놓은 김 신부의 스테인드글라스는 프랑스 언론의 단골 취재 대상이 됐고 순례객들의 발길도 줄을 이었다. 이날 연주회가 끝난 후 마을 사람들은 성당 안의 불을 켜 스테인드글라스의 은은한 빛이 성당 앞마당으로 비쳐 나오도록 했다. 이들은 자정이 넘도록 소박한 시골음식을 나누며 동양에서 온 신부 ‘페르 김(P`ere Kim)’을 칭송했다.

○ 동양의 붓으로 창조해낸 스테인드글라스

프랑스 브리우드 시에 있는 생 쥘리앵 성당의 스테인 드글라스. 생명의 신비를 역동적으로 그린 김 신부 의 작품이다. 조엘 다마스 제공

김 신부는 6·25전쟁을 겪었던 초등학교 시절 이후 청년 시절까지 매일 하루 한 끼 이상 먹지 못할 정도로 가난과 배고픔에 시달렸다. 서예가였던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붓글씨와 그림에 소질이 있던 그는 서울대 미대에 진학했다. 1967년 졸업 후 미술교사를 하던 그는 새로운 꿈을 찾아 스위스로 유학을 떠났다. 주머니에는 단돈 100달러밖에 없었다. 스위스 프리부르대에 다닐 때에는 밤마다 동물원 야간경비를 하면서 생활비를 벌었다.

힘겨운 유학생활 중에도 그는 도미니크수도회의 사제가 마련해 준 지하실에서 그림을 그렸다. 이후 도미니크수도회에 정식으로 입회해 1974년 사제품을 받았다. 파리에서 기도와 묵상을 하고 그림을 그리는 수도사제로 평생 살아 온 그는 1990년대 말 앙굴렘에서 우연한 기회에 지인의 소개로 스테인드글라스를 시작했다.

그의 첫 작업은 세계적인 화가 마르크 샤갈(1887∼1985)의 작품을 스테인드글라스로 만들었던 유리공예 장인 샤를 마르크 씨의 도움을 받았다. 자신은 그림만 그려주었는데 3개월 뒤에 가보니 똑같은 그림이 스테인드글라스로 제작돼 있었다. 샤갈도 훌륭했지만 이를 스테인드글라스로 해석해낸 마르크 씨의 솜씨도 놀라웠다. 하지만 그는 몇 년 후 마르크 씨의 도움을 더이상 받지 않기로 했다. 그의 작품에서 ‘샤갈 냄새’가 너무 짙게 나타난다고 생각됐기 때문이다.

그는 1999년 에브리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를 맡으면서 자신만의 방식을 실험하기 시작했다. 처음엔 전통적 기법에 따라 채색 유리조각을 잘라 이어 붙였다. 그러나 그는 점차 단순화를 추구했다. 시커먼 납선을 과감하게 없애는 대신에 동양의 붓으로 유리 위에 직접그림을 그려 뜨거운 열로 구워냈다. 그림도 성서의 내용에서 탈피했다. 중세시대에 문맹자들을 위해 그림으로 교리를 가르치던 스테인드글라스의 역할은 이제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었다. 논리와 이성, 이미지 대신에 그는 직감을 통해 본질을 깨닫게 하는 아름다움을 추구했다.

2008년 유서 깊은 샤르트르 대성당에 이어 브리우드 생 쥘리앵 대성당의 스테인드글라스 공모전에서 김 신부가 선정되자 일대 파란이 일었다. 전 세계의 유명 화가 50여 명이 참가한 공개경쟁에서 무명에 가까운 동양인 화가가 뽑히자 프랑스 미술계가 깜짝 놀란 것이다. 르몽드는 “스테인드글라스의 새로운 장을 연 김 신부의 제작공법은 동서양을 초월하는 범세계적 기법”이라며 “기존의 작품에서는 느낄 수 없는 역동성과 해방감을 준다”고 극찬했다.

이후 프랑스뿐 아니라 벨기에 스위스 아일랜드 등 전 유럽의 30개 이상 성당에서 김 신부에게 스테인드글라스 제작 요청이 쇄도했다. 종교와 인종을 초월한 그의 작품은 내년 초 이라크 바그다드 소재 대학 ‘오픈 유니버시티’에도 설치된다. 김 신부는 2003년에는 파리의 노트르담 대성당에서 요한바오로 2세 교황 착좌 25주년 기념 ‘아베마리아전’을 열었다. 노트르담 대성당이 내부 공간에서 전시회를 허락한 것은 프랑스 대혁명 이후 200여 년 만에 처음이었다.

○ “인생은 어둠에서 빛을 향해 가는 것”

올해 그는 가장 사랑해오던 사람을 잃었다. 도미니크수도회에서 평생 아버지처럼 따르던 알베르 파트포르 신부가 6월 102세의 나이로 선종했고, 오랜 인연을 맺어온 소설가 최인호도 9월 세상을 떠났다.

QR코드를 찍으면 프랑스 ‘빛의 화가’ 김인중 신부의 스테인드글라스 예술세계를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그는 20년 넘게 해온 스테인드글라스 작업을 통해 인간 존재의 유한함을 더욱 깊이 깨닫게 됐다.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도 태양이 없으면 홀로 빛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인간도 신의 은총이 없다면 죽은 존재와 다름없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그의 스테인드글라스에는 검은색 작품도 많다. 그에게 스테인드글라스란 그저 예쁜 장식이 아니라 죽음을 넘어 영원한 삶으로 향하는 해방의 통로이기 때문이다.

그는 아직도 어린 시절에 겪었던 6·25전쟁 당시의 악몽을 꾼다. 그는 “예술이란 어둠에서 벗어나 빛으로 향해 가는 끊임없는 과정”이라고 말했다.

오르냐크=전승훈 특파원 rap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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