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병준 객원논설위원 국민대 교수
민주화가 진행되면서 뭔가 달라질 것이라 기대했다. 국민의 신뢰를 받는 기관으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 그러나 기대는 기대였을 뿐, 연이어 들어선 민주정부들조차 국정원을 정권의 수단으로 삼았다.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그리고 이명박 정부. 정도의 차이는 있었지만 모두 마찬가지였다. 참여정부 시절 잠시 다른 모습이 비쳤을 뿐이다.
지금도 국정원의 모습은 그대로다. 말썽이 된 댓글 사건이나 남북정상회담 대화록의 공개는 그 모습이 어떠한지 잘 보여준다. 미래 권력을 위해 댓글과 같은 비열한 짓을 하고, 이것이 말썽이 되자 국가의 체면과 격을 떨어뜨리는 대화록 공개까지 서슴지 않았다. 국가관이나 양심을 들먹일 필요도 없다. 가슴 한구석에 자존심의 흔적이라도 남아 있었다면 하지 못했을 일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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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일을 누가 주도할 것인가. 일각에서는 국민과 국회에 맡기라 한다. 국민은 그 주체를 확정하기 힘들고, 국회는 모든 것을 정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밀어 넣는다. 국정원이 수행하는 여러 기능 간의 관계와 그 기능을 중심으로 형성되어 있는 정보 네트워크에 대한 이해도도 낮다. 밀고 당기는 과정에서 어떤 기형을 만들어 놓을지 모를 일이다.
그렇다고 소위 ‘셀프 개혁’에 맡길 거냐. 이건 더욱 아니다. 무엇보다 먼저, 문제의 본질이 국정원 자체에 있지 않다. 정치권력이 국가정보기관을 정치적 수단으로 삼은 것이 가장 중요한 원인이다. 이런 문제를 어떻게 ‘셀프 개혁’으로 해결할 수 있겠나. 이 점에서 국정원 스스로의 개혁을 강조한 박근혜 대통령의 말은 틀렸다. 이를 그대로 되뇌고 있는 여당의 주장도 그렇다.
개혁은 정치권력에 의존해 온 내부의 관행과 문화까지 바꾸는 일이다. 기능 조정이 일어나는 경우 대규모의 재교육과 재훈련도 수반하게 된다. 자정능력이 있고 없고를 이야기할 필요도 없다. 주인이 분명치 않은 그 어떤 조직도 이런 일에 있어 ‘셀프’는 없다.
그러면 누가 해야 하느냐. 답은 명확하다. 대통령이다. 대통령이 아니고서는 이 일을 제대로 해낼 수가 없다. 국정원에 대한 지휘권을 행사하는 존재로서, 또 국정원이 수집하고 생산하는 정보의 가장 중요한 소비자로서, 대통령은 책임을 피할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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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통령이 할 일은 따로 있다. 스스로 어떻게 할 것인가를 정하고, 이를 통해 국정원이 변할 수밖에 없는 개혁적 환경을 만드는 일이다.
먼저 국정원을 정치적으로 활용하지 않겠다고 작정하는 일이다. 단언컨대 쉽지 않다. 엄청난 절제를 요구하는 일이다. 작정을 하고 또 해도 어느 순간 이를 손에 잡게 된다. 손에 전해지는 든든한 기분을 즐기기까지 한다. 지키기 힘든 일일수록 스스로를 묶어야 하는 법. 대통령의 언어로 천명해야 한다. 공개된 약속으로 스스로를 묶으라는 뜻이다.
국정원을 압박할 수 있는 개혁적 환경을 만드는 것도 중요하다. 대통령과 청와대에 보고되는 정보의 범위를 한정시키는 일 등이다. 일테면 국내 문제에서 누가 무엇을 했다는 따위의 행적에 관한 보고를 삼가도록 하는 대신 정책 관련 정보를 대폭 늘리게 하면 어떻게 될까. 소비자의 선호가 달라지면 공급의 내용도 달라지게 마련. 이것만으로도 국정원 내에서는 기능 조정과 전문성 강화 등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대통령과 청와대 입장에서 많은 것이 불편해질 것이다. 권력의 맛도 줄어들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불편은 다시 많은 것을 새롭게 한다. 주말에 TV를 끄면 책도 더 많이 읽고 운동도 더 많이 하게 된다. 같은 이치다. 새로운 권력문화의 출발이 될 수도 있다. 두려워할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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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병준 객원논설위원 국민대 교수 bjkim36@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