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3년 미국인은 왜 수입茶를 버렸나
영국의 식민지였던 북아메리카에서 일어난 ‘보스턴 티 파티’ 장면. 인디언으로 변장한 식민지인들이 차 상자를 바다로 집어던지면서 영국에 대한 저항이 본격화했다. 그림은 너새니얼 쿠리어의 석판화 ‘Destruction of Tea at Boston Harbor’(1846년 작). 동아일보DB
리더의 신호에 따라 이들은 항구에 정박 중인 세 척의 선박에 동시에 올랐습니다. 이때 몇몇 일반 시민이 가담했습니다. 선박은 중국에서 영국 동인도회사가 가져온 차(茶)를 가득 싣고 하역을 기다리던 중이었습니다. 이들은 선장과 선원을 붙잡고 화물칸으로 내려가는 갑판 승강구의 열쇠를 달라고 요구했습니다. 선장은 순순히 열쇠를 내주면서 선박만큼은 훼손하지 말라고 간청했습니다.
이들은 그렇게 하겠다고 약속하고는 화물칸에서 차 상자를 꺼냈습니다.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도끼로 상자를 부순 후 차 상자를 바다에 던졌습니다. 차가 바닷물에 젖으면서 팔 수도, 먹을 수도 없게 됐습니다. 약 3시간 후 선박에는 차가 하나도 남지 않았습니다. 이날 바다에 던져진 차는 중국 푸젠 성 우이 산에서 생산된 우이옌(武夷巖)차입니다. 모두 342상자가 파손됐는데 오늘날의 가치로 환산하면 1만 달러어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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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청난 가치의 차를 의도적으로 파손한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오늘날 커피를 즐기는 이들이 많듯이 당시에는 차를 즐기는 사람이 많았습니다. 차에 대한 수요는 영국에서나 아메리카 식민지에서나 매우 높았습니다.
아메리카 식민지에서는 두 가지 종류의 차가 팔렸습니다. 하나는 영국의 동인도회사에서 수입하는 차, 다른 하나는 네덜란드 상인에게서 밀수하는 차였습니다. 정식으로 수입하는 차는 세금을 물어야 했지만 밀수한 차는 그럴 필요가 없었죠.
영국 의회는 차 세법을 통과시켜 차에 대한 관세를 실질적으로 없애고 명목상으로 1파운드당 3펜스를 세금으로 내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중국에서 차를 가져오는 동인도회사가 중간 상인을 거치지 않고 식민지에서 직접 팔도록 했습니다. 이렇게 하면 아메리카 식민지에서 차의 가격이 떨어지고 밀수가 사라진다고 생각했죠. 식민지인의 입장에서 보면 차를 보다 싼 가격에 마실 수 있으니 환영할 만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식민지인은 그렇게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차 세법으로 당장은 경제적으로 이익이 되지만, 입법 이면의 논리에 크게 불만을 품었습니다. 식민지인은 식민지에서 대표를 선출하여 영국 의회에 보낸 적이 없으니 영국 의회가 식민지에 대해 직접 과세할 권한이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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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보스턴 차 사건은 단순히 물건을 훼손한 난폭 행위가 아니라 영국에 대항하는 반역행위였습니다. 붙잡히면 반란죄로 목숨을 잃을 것을 각오한 행위였죠. 이 사건을 일으킨 사람들은 스스로를 ‘자유의 아들들’이라고 불렀습니다.
사건이 일어난 다음 날 아침 보스턴 항구에는 완전히 부서지지 않은 차 상자 여러 개가 물 위로 둥둥 떠다녔습니다. 시민들은 작은 배를 타고 나가 노(櫓)로 상자를 힘차게 내리쳤습니다. 모든 상자가 부서지고 중국산 차는 물속으로 전부 사라졌습니다.
벤저민 프랭클린을 비롯한 식민지 지식인들은 자유의 아들들이 주장하는 대의에는 공감하지만 파손된 차는 배상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개인 소유의 물건이었기 때문이죠. 실제로 로버트 머리라는 뉴욕 상인은 식민지 총독을 찾아가 자신이 배상할 용의가 있다고 밝혔습니다. ‘대표가 없으면 과세도 없다’는 헌정원칙의 수호를 더욱 드높이고자 하는 의도에서 나온 움직임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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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형 이화여대 사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