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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5세 조세형 ‘대도무상’

입력 | 2013-04-05 03:00:00

빠루로 유리창 깨고 빌라 털다가 주민신고로 붙잡혀
“사무실 보증금 때문에 아마추어도 안할짓 했다” 자탄




가정집을 털다 붙잡힌 ‘대도’ 조세형 씨가 4일 오전 서울 서초경찰서에서 조사받고 있다. 조 씨는 “카메라가 내 얼굴을 찍는 것이 부담스럽다”며 점퍼로 가려줄 것을 경찰에 요청했다. 변영욱 기자 cut@donga.com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지자 회색 모자와 하늘색 마스크를 쓴 얼굴이 뒤를 돌아봤다. 경찰을 발견한 남자는 손에 들고 있던 만년필을 위협하듯 들이대며 말했다.

“내가 조세형이다.”

“엎드려라. 반항하면 쏘겠다.”

그는 저항을 포기한 채 순순히 방바닥에 엎드렸다. 수갑을 채우는 순간 한때 ‘대도(大盜)’라 불렸던 사내가 한숨을 내쉬며 내뱉었다. “인생 끝났네.”

조세형 씨(75)가 3일 오후 8시 반경 서울 서초구 서초동의 한 빌라를 털다가 이웃 주민의 신고로 현장에서 붙잡혔다. 1970, 80년대 부잣집을 상대로 대담한 절도 행각을 하며 이름을 날렸던 그답지 않게 초라하고 엉성한 수법이었다. 그는 두께 6mm 유리창 두 개를 노루발못뽑이(속칭 ‘빠루’)로 깨뜨리고 빈집 안으로 들어갔다. 이웃들이 유리창 깨지는 소리를 들을 수 있을 정도로 소음이 났다. 경찰에 신고한 이웃 빌라 주민 정모 씨(39)는 “갑자기 유리창 깨지는 소리가 들려 밖을 내다보니 모자와 마스크를 쓴 남자가 빠루를 들고 있었다”고 말했다.

조 씨 스스로도 경찰에서 “인근 공사장에서 주운 빠루로 밤에 시끄럽게 유리를 깨니까 이웃 주민이 신고한 것 같다”며 “그게 프로가 할 짓이냐”고 자탄했다. 그는 “선교사무실에 대한 간절함 때문에 아마추어도 하지 않을 짓을 했다”고 말했다.

조 씨는 경찰 조사에서 “전처가 ‘새 출발을 하고 떳떳한 아빠의 모습을 보여 달라’며 준 3000만 원을 1년 전쯤 한 무속인에게 사기당한 뒤 도저히 선교사무실 임대 보증금을 마련할 수가 없었다”고 범행 이유를 설명했다. 돈을 마련하기 위해 미리 범행을 계획하고 3, 4일 전에는 종로구 종묘 쪽에서 범행에 사용된 노루발못뽑이 두 개 중 하나와 펜치 등을 구입했다. 그는 “(서초동은) 예전에 도둑질을 할 때 많이 와 봤던 지역이지만 그 집을 노리고 온 건 아니었다”며 “옛날에도 그냥 돌아다니다가 잘산다 싶은 집이면 즉흥적으로 들어갔다. 돈이 될 것 같았고 불이 꺼진 것을 보고 들어갔다”고 진술했다.

집 안에 침입한 지 35분여 만에 방 안에서 붙잡힌 조 씨의 주머니와 쇼핑백에서는 롤렉스 시계 2개와 금반지, 귀걸이 등 시가 3000만∼5000만 원 상당의 귀금속 33점이 발견됐다. 모두 같은 집에서 훔친 것이었다.

조 씨가 생활고에 시달린 것은 아니었다. 그는 “교회 등 강연을 다니면 한 달에 100만 원에서 150만 원 정도는 받기 때문에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먹고살 수 있었다”고 말했다. 경찰 관계자도 “생활고에 시달렸다는 정황은 없다”고 밝혔다.

조 씨는 1982년 경찰에 붙잡혀 15년 동안 수감됐다가 1998년 출소한 뒤 신앙생활을 시작했다. 교회에서 간증을 하거나 모 사설경비업체의 자문위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대도’의 도벽(盜癖)은 제어할 수 없었다. 2000년 말 선교 활동을 위해 일본에 간 그는 도쿄(東京) 시내의 주택에 침입했다가 일본 경찰이 쏜 총에 맞아 붙잡혔다. 일본에서 만기 복역 후 2004년 4월 귀국한 그는 이듬해 또다시 서울 마포구 서교동의 단독주택을 털다 검거됐다. 2011년에는 금은방 주인과 가족을 위협해 금품을 빼앗은 혐의(강도상해)로 구속됐다가 무죄를 선고받았다.

점퍼로 얼굴을 가린 조 씨는 “3, 4일 전에도 대구 교회에서 강연을 했다”며 “기독교 신자로서 해서는 안 될 짓을 해서 죽고 싶다. 이제는 기독교 신자라고 말할 자신도 없다”고 말했다.

조 씨는 “서울 시내 사우나나 찜질방을 돌아다니며 잠을 잤다”고 주장했지만 경찰은 동대문구 장안동 내연녀의 집에서 생활한 것으로 보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여죄가 더 있을 것으로 보고 수사를 계속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박희창·박훈상 기자 ramblas@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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