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은 “추격자인 한국 기업들이 경쟁에서 이기려면 글로벌 스탠더드에 더해 우리에게만 존재하는 차별화 요소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현 전 회장은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1993년 신경영을 추진할 때 삼성그룹 비서실장을 맡아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최훈석 기자 oneday@donga.com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 1993년 6월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선언한 ‘신경영’의 핵심 메시지다. 신경영은 양적 경영에서 질적 경영으로, 매출 위주에서 이익 위주로, 국내 제일에서 세계 일류로의 전환을 의미했다. 당시 이 회장이 신경영을 추진할 때 그 옆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있다. 바로 현명관 전 삼성물산 회장이다. 그는 1993년 10월부터 약 3년간 삼성그룹 비서실장을 맡아 이 회장을 지근거리에서 보필했다. 올 6월 신경영 선언 20주년을 앞두고 현 전 회장을 만났다. DBR(동아비즈니스리뷰) 125호(3월 15일자)에 게재된 인터뷰 주요 내용을 소개한다.
―6월이면 신경영 선포 20주년이 된다.
문제는 바로 그 다음 날이었다. 회장과 함께 식사하는 자리에서 전자 관련 계열사 사장단을 향해 질문이 쏟아졌다. ‘삼성전자 TV는 백화점 진열대 어디에 있습디까?’ ‘소니 같은 일류 제품과는 가격 차이가 얼마나 납디까?’ ‘판매사원이 고객에게 제품을 권유할 때 어느 브랜드 제품을 추천합디까?’ 등등. 그 다음 날엔 호텔 연회장을 통째로 빌려 TV, 냉장고, 세탁기, 전자레인지 제품을 모조리 분해해 진열해 놓고는 ‘TV 리모컨에서 사람들이 가장 많이 쓰는 버튼은 뭡니까?’ ‘무엇 때문에 삼성 TV는 3류 취급을 받고 있나요’라며 반나절 동안 쉴 틈 없이 사장단을 다그쳤다. 국내에선 1등이라고 자만하지만 세계 시장에서 삼성은 꼴찌, 잘해봤자 3류에 불과하다는 현실을 사장단 스스로가 깨닫게 하려고 했던 이 회장의 깊은 뜻을 그때에서야 깨달았다.”
―신경영의 핵심 철학은 무엇인가.
“경쟁력을 높이자는 것이다. 안타까운 건 현재 기업을 둘러싸고 벌어지고 있는 논의의 초점이 온통 지배구조에 맞춰져 있다는 점이다. 분명히 말하지만 지배구조란 경쟁력을 강화시키기 위한 하나의 수단일 뿐이다. 절대적으로 좋은 지배구조란 세상에 없다고 생각한다. 기업 문화, 산업 특성 등에 따라 최적의 지배구조는 제각각 다르다. 비슷한 맥락에서 글로벌 스탠더드도 기득권을 가진 강자의 논리에 지나지 않는다. 추격자인 우리가 경쟁에서 이기려면 글로벌 스탠더드에 더해 우리에게만 존재하는 차별화가 플러스돼야 한다.”
―차별화는 구체적으로 어떻게 실천하나.
차별화는 업(業)에 대한 정의부터 새롭게 해나가는 데에서 시작해야 한다. 호텔업을 단순히 식당에서 밥 먹고 커피숍에서 사람 만나고 객실에서 잠잘 수 있게 해 주는 서비스업으로 정의한다면 호텔 직원들은 손님들에게 ‘어서오세요’ ‘무엇을 드시겠습니까?’ 정도의 말을 친절하게 건네는 것으로 임무가 끝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호텔업을 ‘상대방을 알아주는 사업’이라고 정의해 보자. 김 사장을 알아주기 위해 노력하는 식으로 서비스의 초점이 바뀌게 된다. 이를 위해선 김 사장의 차량 번호는 물론이고 과거 투숙 경력이나 식사는 뭘 했는지 같은 정보까지 훤히 꿰고 있어야 한다.
물론 업을 새롭게 정의하기만 한다고 차별화가 저절로 이뤄지진 않는다. 실제 조직원들이 차별화를 실행할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한 예로 나는 호텔신라 재직 시절 ‘고객 차량번호 맞히기 대회’를 열어 도어맨들 대부분이 차량 번호를 외우도록 했다. 별것 아닌 일 같지만 작은 혁신의 불씨라도 전체로 확산될 수 있도록 제도와 시스템을 만드는 게 지도자가 할 일이다.”
―리더십에서 가장 중요한 자질은 무엇이라고 보나.
“설득력이다. 리더의 비전, 리더가 생각하는 경영 목표를 조직 구성원들에게 전달해 그 사람들이 리더를 믿고 따르도록 해야 한다”
“전문성이다. 처음 호텔신라에 부임했을 때 호텔에 대해 알 턱이 없던 나는 매일같이 오전 5시에 출근했다. 당시 직원들의 아침 교대근무 시간이 오전 7, 8시였지만 그보다 두세 시간 일찍 나와 23층 꼭대기부터 지하 5층 기계실까지 다 돌아다녔다. 소화기는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지, 주방 냉장고는 문제없이 돌아가고 있는지, 행주와 도마 소독은 제대로 돼 있는지, 객실 화장실 청소는 깨끗하게 잘돼 있는지 등을 일일이 점검한 후 아침 회의에 들어갔다. 부하 직원보다 내가 현장 상황을 더 많이 알고 있으니 조직 장악력이 안 생길 수 없었다.”
―최고경영자(CEO)가 너무 세세한 사항까지 일일이 챙길 필요가 있나.
“삼성물산 부사장 시절 내 별명이 ‘현 대리’였다. 당시 경기 성남시 분당에 백화점(당시 삼성플라자 분당점)을 오픈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다. 오전 2시에 관리자에게 문을 열게 해서 불시 점검을 했다. 푸드코트를 돌아보며 냉장고, 도마 등 어떤 곳이라도 문제가 있으면 종이에 지적 사항을 적어 붙여 놓았다. 이런 불시 점검 이야기가 이건희 회장의 귀에 들어갔던 것 같다. 며칠 뒤 열린 사장단 회의에서 ‘요즘 현 부사장을 현 대리라고 한다면서요?’라며 웃으셨던 기억이 난다.
내가 불시 점검을 했던 이유는 식중독이나 안전사고처럼 미리 예방할 수 있는 문제들이 발생하지 않도록 해야 한다는 의식을 심어주기 위해서였다. 안전 관리나 위생 관리는 일회성 이벤트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몸에 배어야 하는 중요한 업무라는 점을 피부로 느끼게 했다. 물론 CEO가 매일 매장을 돌아다닐 필요도 없고 그래서도 안 된다. 하지만 알고 맡기는 것과 모르고 맡기는 건 천지 차이다. 현 대리가 아니라 현 주사라고 불린다 하더라도 나는 CEO가 세세한 부분까지 알고 있어야 한다고 믿는다. 이런 소소한 부분에서부터 전문성이 생기기 때문이다.”
이방실 기자 smil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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