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혁 국립암센터 암정책지원과장
살아남은 5% 시력으로 공부해
나는 갓난아기 때부터 선천성 망막색소변성증을 앓았다. 어렸을 때부터 날이 어두워지면 사물을 식별하기가 어려워 놀다가도 집에 들어가야 했고, 밤에 화장실 가다가 실수도 많이 했다. 고맙게도 시력이 아직 남아 있어 어찌어찌 공부를 할 수 있었고, 다행히 의사(연구직)가 될 수 있었다.
음식점이나 극장에 가는 것도 어렵다. 웬만한 맛있는 레스토랑은 실내가 어두운 경우가 많다. 나는 맛있는 집에 가는 것이 아니라 ‘쉽게 찾을 수 있고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집에 가게 된다.
지금까지도 내 정강이에는 항상 멍이 있다. 길거리 턱들과 장애물로 인해 무릎이 까이고 넘어지는 일이 다반사였고, 멍이 없어질 쯤에 다시 넘어졌기 때문이다.
직장 생활도 언제까지 유지할 수 있을지 걱정이다. 나는 연구직이라 전문 분야에는 나름 소식이 밝지만 일반 사람들이 이야기하는 가십거리나 최근 유행, 사내(社內) 정치엔 매우 둔하다. 정보 접근성, 이동성 부족으로 직장에서의 생존이 언제까지 가능할지 두렵다. 나만 그런 게 아니다.
한국시각장애인 복지관은 1982∼1997년 45명의 피아노 조율사를 양성 배출했으나, 그중 3명만이 자영으로 피아노 조율 일을 하고 있으며 39명은 현재 안마업에 종사하고 있다고 한다. 시각장애인은 비시각장애인보다 청각 능력이 뛰어나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인데도 불구하고 비장애인과 똑같은 출발점에서 경쟁할 경우에는 그러한 장점들조차도 상쇄돼 경쟁에서 도태된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 겨울 바람이 분다’의 오영처럼 장애인인 걸 인지하고 싶지 않아도 저절로 인지하게 되는 순간이 점점 많아졌다. 다른 장애인들의 애환이 남일 같지 않았다. 아니, 이제 내 일이 된 거다. 몸이 불편해 불이 난 집에서 탈출하지 못해 죽고, 중증장애인이 굶어죽는 일들이 일어나도 추호도 내 일이 아닐 거라고 생각하고 싶은데, 이제는 나에게도 일어났구나 하는 생각이 들게 된 것이다.
방에만 있는 장애인에게 기회를
아직도 우리나라 장애인은 어두운 방구석에 가구처럼 남겨져 있다.
그래서 알았다. 나보다 더 나은 재주를 가지고도 교육을 못 받고, 일도 못 하고, 방안에만 박혀 있는 수많은 장애인이 있다는 것을. 그들에게 국가가 기회를 주었더라면 나보다 훨씬 훌륭한 박사가 되었으리라는 것을. 나는 요즘 하루에도 몇 번씩 홀로 고립된 그들만의 세상, ‘장애인의 나라’에 들렀다 온다. 지금은 하루에 몇 번에 불과하지만 앞으로 내가 시력을 잃게 되면 머무르게 될 그 나라에 말이다.